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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최영훈의 법과 사람]임란 때 순절한 의병장 고경명 3父子

입력 2016-06-11 03:00업데이트 2016-06-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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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수석논설위원
현충일 하루 전인 5일, 한나절에 세 번 눈시울을 붉혔다. 임란 때 전라도 의병대장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1533∼1592) 선생의 대종가(大宗家)를 방문했을 때다.

제봉은 임란 때 치열했던 금산전투에서 순절(殉節)했다. 빼어난 시문으로 명나라에까지 이름이 났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년)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해 벼슬을 시작했다. 요즘 말로 고시 수석합격이다. 울산 영암 한산 서산 순창군수를 거쳐 임란 한 해 전 동래부사를 끝으로 낙향했다.

노년의 제봉은 왜적의 침략으로 선조가 의주로 파천(播遷)했다는 소식에 분연히 일어섰다. 59세로 건강이 온전치 않았지만 격문을 돌려 의병 6000명을 모았다. 유팽로 안영 양대박을 종사관으로 삼고 출사표를 조정에 보냈다. 도성을 떠나는 선조에게 돌팔매가 날아왔지만 제봉은 근왕(勤王)을 다짐했다.

그는 아들 인후에게 무주, 진안에 복병 수백 명을 배치해 왜적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그 후 진을 옮겨 장남 종후, 차남 인후와 합류한 뒤 호서, 경기, 해서 지역에 창의구국(倡義救國)의 격문을 보냈다. 이 무렵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호남 총공세를 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제봉은 호서 의병장 조헌에게 왜적 토벌을 제의했다. 그러나 조헌은 청주 공략에 바빠 참전을 못한다. 제봉은 전라도 방어 관군과 함께 왜적이 주둔한 금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1만 명 넘는 왜적의 저항과 관군의 무능함으로 일진일퇴만 거듭했다. 왜적은 취약한 관군부터 무너뜨린 뒤 의병부대를 기습했다.

그때 제봉과 차남 인후 등 수많은 의병이 목숨을 잃는다. 비록 패했지만 의병들의 피어린 분투로 왜적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곡창 전라도를 왜적이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충무공의 수군(水軍)이 해전에서 연승할 수 있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는 말이 생각난다.

치열한 금산전투에서 장남 종후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40여 일 뒤 간신히 수습하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복수(復讐) 의병장’으로 칭한다. 진주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김천일 등과 함께 왜적을 상대로 9일간 사투를 벌이다 전세가 기울자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3부자가 한 전쟁에서 순국(殉國)한 사례는 세계 전사(戰史)에 없다. 3부자는 과거에 급제한 문인들이다. 15세 막내도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터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제봉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거라”라며 자신의 시문집을 잘 보관할 것을 당부한 뒤 막내를 돌려보냈다. 출가한 장녀는 몇 년 뒤 정유재란 때 남편이 왜적의 칼에 전사하자 장검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막내가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뒤 선생이 남긴 유고 문집을 편찬했다. 여기엔 달리는 말 위에서 초를 잡은 ‘마상격문(馬上檄文)’도 있다. 각 도의 수령과 백성, 군인에게 보낸 격문은 많은 의병들이 선생의 휘하에 모이게 만든 명문이다.

담양의 대종가 고택 벽에는 ‘세독충정(世篤忠貞)’이라는 휘호가 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 선생의 좌우명이다. 고결한 성품의 선생이 당대의 문장가라는 사실, 명색이 글쓰기로 30년 밥벌이를 한 내가 까맣게 몰랐다. 참으로 낯이 뜨거웠다.

호국의 달인 6월, 고경명 선생과 같은 호국선열을 기리는 현창(顯彰) 사업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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