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매거진]南北 20대 젊은이 '한낮의 데이트'

  • 입력 2001년 5월 22일 18시 27분


우리의 교과서는 1950년 6월 25일 북에서 '공산주의 적화통일'을 위해 인민군이 밀고 내려왔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으로 맥아더 장군을 중심으로 한 UN군이 공산당을 무찌르는 데에 앞장섰다고,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분단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우리의 교과서에서 국군은 거의 언제나 승리한다. 뼈아픈 패배도 있지만 그 패배는 영웅적인 희생이고 승리는 달콤하고 잦다.

그리고 그곳에 '노근리'는 없다. 피난 나선 주민들에게 기관총을 쏘아댄 미군의 이야기가 우리의 교과서에는 없다.

▼한반도의 북쪽,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그곳의 교과서는 이 전쟁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까.

1993년에 북을 떠나 중국·베트남·대만 등을 떠돌며 대사관 앞에서 문전박대 당하고 분노와 절망의 눈물을 흘리던 끝에 1994년 남쪽으로 온 사람, 김형덕(28)씨를 만났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반 학생으로, 김성호 의원의 비서관으로 바쁘고 벅차게 살고 있는 사람. 그는 18세때까지 북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가 배운 전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렵게 그를 만나 마주앉자마자 "북쪽에서는 6·25전쟁을 어떻게 가르치나요?"라고 물었다.

형덕:조국해방전쟁 말입니까? 자세한건 잘 모릅니다. 다만 학교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에 이승만 괴뢰도당이 쳐들어왔지만 단번에 반격, 서울을 함락시켰다고 배웠지요.

은지:북침이었다는 거죠?

형덕:그렇지요. 그런데 그때는 아무 의심 없이 그냥 외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해요. 갑자기 북침을 당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반격할 수 있었을까요? 실제로는 북쪽에서 쳐들어간 것이거나 적어도 전쟁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겠지요.

은지:북쪽에서는 UN군과의 관계는 어떻게 보고 있나요?

형덕:남쪽에서는 '인천 상륙작전'이라고 한다지요?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배운 바가 없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승만이 미국을 위시한 괴뢰국가 10여개 나라를 UN군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들였고 이에 우리가 전략적 후퇴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UN군이라는 존재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국'이 문제인 거지요.

은지:전략적 후퇴라는 말이 재미있는데요.

형덕:어쩌면 남쪽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북쪽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을 북쪽에서 완전히 주도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퇴각이라고 하지 않고 '전략적'후퇴라고 하는 거지요. 중공군이 도와줬던 것을 자세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북쪽에서 그 전쟁의 주체는 철저하게 북쪽이고 그 적은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에요. 또한 북에서는 '민족상잔'의 전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인민군은 미국과 이승만 괴뢰당으로부터 남쪽의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싸운 것이니까 북이 싸운 대상도 남쪽의 '민중'은 아니며 당연히 '민족상잔'이 아닌 거지요.

은지:모든 전쟁에는 이긴 싸움도 있고 진 싸움도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사실 남쪽 교과서도 대부분 이긴 전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거든요. 북쪽은 어떤가요?

형덕: 마찬가지지요. 더 심할 수도 있구요. 패배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있다해도 전략적 후퇴이거나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던 희생의 아픔으로 미화되지요. 그리고 대부분은 승리의 영웅담입니다.

남쪽이 얼마나 저항했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하지 않지요. 전쟁이야기의 대부분은 김일성 장군이 얼마나 뛰어난 전략전술을 발휘해서 승리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은지:남쪽에서는 최근 들어서야 노근리 등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역사가 드러나고 있는 반면 이북에서는 예전부터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뤄 왔다고 들었습니다.

형덕: 예. 이북에서 미국이 저지른 학살 문제는 아주 중요한 역사의 한부분입니다. 실제로 신천에서처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아픔과 분노에 할애된 역사가 거의 20%가 넘습니다. '신천박물관'도 유명하지요. 많은 기록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의 도덕성에 흠집내기' 차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요.

하나의 전쟁을 북과 남에서 어떻게 다르게 이야기하는지를 직접 보고 느낀 김형덕씨는 말하고 싶어한다.

"역사를 현재의 시각만 가지고 보는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당대의 사람들이 써놓은 것은 주관적일 수 밖에 없어서 문제가 많지요. 그리고 물론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잘못이기는 하지만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사실 저는 먼저 쳐들어간 것은 북쪽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 그때의 시대 상황으로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잖아요. 이승만 정권하의 남쪽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았던 만큼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을 수도 있지요. 어쨌든 북쪽의 입장으로 보면 인민군은 미군과 싸운 거지 남쪽과 싸운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지금이야 상황이 변했지만 당시만 해도 이승만 정권보다 김일성 정권이 더 정통성이 있지 않았나요? 체제의 정통성도 그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전쟁에서 남쪽이 승리했다면 어쩌면 필리핀처럼 새로운 식민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하는 그는 북쪽의 역사관에 대해 '혁명적 역사관'이라고 평한다.

"혁명적 역사관, 혹은 인민의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지요. 기본적으로 지배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입장에서 인민에 의한 역사를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다소 변질된 경향이 있어요. 특히 현대사에 있어서 그렇지요.

김일성 수령 중심으로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말하자면 다시 지배자의 입장으로 변질되었다고 할까요. 사실 과거나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깊이 연구하려면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권력구조에 대해 논하게 되면 다스리는 게 쉽지 않지요. 그래서인지 권력구조에 대한 서술이 별로 없어요."

그는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그 전쟁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많이 참는다. 아직은 우리 중 그 누구도 그 전쟁에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남북이 하나가 된 후에야 그 전쟁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지금 우리 세대, 혹은 우리 이후의 세대나 돼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짧았다.

그와 쉽게 마음을 터 놓기에는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우리들이 서로 다르게 지내온 역사가, 배워온 것들이 여전히 너무 달랐다.

"북에서 온 사람 처음 만나죠?" 라고 물어보는 그나, "예" 하고 대답하는 나나 왠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그는 북쪽 말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나는 그가 우연히 꺼낸 '건늠길(횡단보도)'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서로의 차이를 느낄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자주 만나야지,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지, 그래야 우리가 조각난 기억과 조각난 사실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을 이룰 수 있지. 1950년 6월 25일의 그 전쟁도 만나다 보면 하나의 완전한 그림이 나올 수 있겠지. 그러면 비로소 '역사'로서 존재할 수 있겠지. 그러면 더 이상,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현대사'가 시험에 거의 나오지 않는, 아주 소소한 비율만 차지하는, 형식상 교과서 한켠을 차지하는 그런 일은 없겠지. 묻는 이도, 답하는 이도 어색한 그런 주제, 그런 사이는 없겠지.'

그래도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햇살은 참 화사하고 따뜻했다.

강은지/민족21 기자

(이 글은 국제민주연대 '사람이 사람에게' 5·6월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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