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의 LA리포트]돈에 휘둘리는 미국정치

  • 입력 2001년 3월 21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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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정치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돈으로 살 수 있는 최상의 정치’ 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최상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말 대통령선거를 통해 숨겨진 문제점이 드러나긴 했지만 미국정치는 여러 면에서 최고의 민주주의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돈이 너무나 많이 들어가고 돈이 승패를 좌우한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난 대선만 해도 4년 전에 비해 80% 가량 늘어난 32억달러에 달하는 선거자금이 사용됐습니다. 한 정치학자의 최근 책 제목처럼 미국정치를 지배하는 변치 않는 ‘황금률’은 “황금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자금줄 기업 입김 막강▼

“공화당원처럼 살려면 민주당에 투표하라”는 트루먼 대통령의 선거구호처럼 공화당이 ‘부자들의 정당’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주당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민주당이 소수민족,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이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있지만 주된 자금줄은 역시 기업입니다. 결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각각의 기업연합의 지지에 기반해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민주당이 주로 하이테크 산업과 할리우드 등에 자금을 의존한다면 공화당은 국방산업과 석유회사 등에 의존한다는 차이입니다.

그 결과로 대형총기사건이 잇따라 터져도 총기회사의 포로가 된 정치권은 총기규제법 하나 제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의회는 지난 대선에서 신용카드회사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주도 아래 파산선고를 받아도 신용카드 빚은 계속 갚도록 하는 파산법 개정안을 최근 통과시켰고, 부시대통령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낸 1700명이 새 정부의 대사직을 신청해 부시대통령이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우려되는 것은 주민들이 직접 법안을 제안하고 만들어 ‘민주주의의 꽃’,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 통하는 직접민주주의의 기제들, 즉 주민발의, 주민투표까지도 ‘황금의 지배’ 때문에 타락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주민발의의 승패는 결국 자금력에 의해 좌우되고 이는 다시 유령단체를 내세워 주민발의를 뒤에서 지원하는 막후기업의 지원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정치가 얼마나 황금의 지배에 오염돼 있는가는 최근의 두가지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사업가는 지난해 12월 선거에서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 주정부가 취학학생 1명 당 3000달러의 등록금 지원증서를 나눠줘 사교육이나 공교육 중 선택해 쓰도록 하는 주민발의안을 내놓으면서 이를 지지하는 유권자를 많이 모으는 사람들에게 컴퓨터, 하와이 여행권, 백화점 상품권 등 7만3000달러 상당의 상품을 주겠다고 공약하고 나섰습니다. 나아가 공화당은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인터넷 쇼핑센터에서 물건을 사면 금액의 10%를 정치자금으로 적립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개설했는데 판매품목 중에는 플레이보이의 포르노비디오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태가 이처럼 심각해지자 부시대통령은 노조와 기업이 각각 조합원과 주주들의 승인을 받아야 정치자금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개혁안을 제의했습니다. 또 지난 예비선거에서 부시대통령을 애먹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민주당의 로셀 페인골드 의원과 함께 정당을 통해 우회적으로 후보에게 전달되는 ‘소프트 머니’를 봉쇄하는 근본적인 개혁안을 내놓았습니다.

▼투명성 확보는 본받아야▼

그러나 이들 법안이 이해 당사자들인 상하원의 합의를 거쳐 현실화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정치자금에 관한 한 미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 않는 것이 한국정치라는 점에서 한국에도 정당지지 인터넷 쇼핑센터가 생겨나 민주당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젖소부인’ 시리즈를, 한나라당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애마부인’ 시리즈를 구입해야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최소한 투명성은 있다는 점에서 정치자금이 베일에 가려진 검은 돈으로 남아 있는 한국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우리도 이제 정치자금 개혁법을, 아니 최소한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만이라도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최소한 안기부 정치자금 소동 같은 것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호철(서강대 교수·현 UCLA 교환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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