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매거진]일본사람이 본 '여성국제전범 법정'

입력 2001-01-29 11:47수정 2009-09-2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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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의 평화와 인권지수를 평가하며 일본사회가 이후 어떠한 길을 선택할지 좌우할 재판-과거 일본군의 '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이 지난해 12월 8일부터 5일간,도쿄 구단회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열렸다. 12월 8일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날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성노예제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에게는 귀에 익숙하지 않은 말이다. 일본 사람들 속에는 "위안부(정신대)란, 강요당한 것이 아닌, 돈벌이를 하는 매춘부"라는 식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가진 사람이 아직도 많다.

때문에 이 법정을 주최한 국제실행위원회는 천황을 정점에 둔 일본 정부와 군부가 조직적으로 젊은 여성들을 납치,연행,감금,강간했으며 그것은 성노예 제도임에 다름없음을 인식시키기 위해 '성노예제'란 말을 사용했다.

위안소에 있었던 위안부들은 한반도만 해도 20만명을 넘었었다고 한다. 그 성노예제의 희생이 된 동남아시아 9개국의 전(前)위안부 64명을 비롯해서 연일 1000명을 넘는 참가자들이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한국에서는 전(前)위안부 21명을 포함한 220명, 북한에서는 전(前)위안부 2명을 포함한 11명이 참가했다.

마지막 날인 12일. 미국,영국,아르헨티나,케냐에서 온 대학교수 및 전(前)재판관 등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4명의 재판관단은 약 2시간에 걸쳐서 판결문을 교대로 읽었고, 마지막으로 가브리엘 맥도널드 재판관(옛 유고슬라비아 국제전범소장·미국)은 "일본천황 히로이토는 인도(人道)에 관한 죄로 말미암아 유죄로 판결합니다"라고 선고했다.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참가자들의 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전후 극동군사재판에서는 증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전쟁 책임과 위안부 문제는 뒤로 미루어졌다가 불문(不問)한다는 식으로 봉인되었다.

그 터부가 반세기도 넘는 20세기 최후에 와서 민간 여성들의 손으로 무너뜨려져, 천황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인정된 것이다. 국가가 그리고 국제 기관이 재판할 수 없었던 전쟁에서 성학대라는 인권 침해를 민간 법정이 판가름했다는 것은 인류 사상 획기적인 일이다.

판결에 이르기까지 4일간, 이제 70대가 된 위안부들은 자신이 겪었던 젊은 시절의 비인간적인 '성 학대' 체험을 적나라하게 밝혔는데 그것을 메모하는 것은 참으로 슬펐다.

건강상태가 나빠서 재판에 참가하지 못해 비디오 영상으로 증언한 한국의 김복동(74세)씨는 경남 양산 태생으로 15살 때 연행되어 중국 광동(廣東)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시아 각지를 이동해야 했고, 패전을 싱가포르에서 맞게 된 전형적인 위안부이다. 위안부명은 '가네므라 후유꼬' 또는 '요시꼬'로 불렸다.

'제가 간 곳에는 장교들이 쭉 줄을 서 있었고, 먼저 신체검사를 받고나서 다른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네 방이다'라고 정해진 곳은 베니어 판으로 칸을 나눈 좁은 방이었고 옆방의 숨소리도 들리는 형편없는 곳이었습니다. 밤이 되면 장교가 와서 '옷 벗어'라고 했고, 낮에도 벗겼었는데 또 그래야 되나 싶어서 어느 날은 도망갔습니다. 화가 난 장교는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때렸습니다. 나이가 어린데 심하게 다루니 피가 나고 아파서 소변을 볼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피 묻은 옷을 빨려고 2층에 올라갔더니 여자아이들이 울면서 '이대로 살아봤자 별 수 없어, 우리 죽을까'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강간당했구나 싶었습니다."

한국이나 북한 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네덜란드의 여성들 모두가 자신이 당한 성적 학대를 차례로 밝혔다.

▼인간도 여성도 아닌 짱꼬로▼

이번 여성국제전범법정에는, 중국으로 출병했던 2명의 일본군 병사가 참가해, 위안소의 실태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강간 체험을 증언했다. 지금까지 무차별하게 현지 주민들을 학살한 체험을 밝힌 병사는 있었으나 강간 체험을 말한 사례는 처음일 것이다.

=복지나 방면 군 소속 부대에서 하사관으로 있었던 전(前) 일본군 병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처음에는, 위안부는 돈벌이를 하려는 본인의 의사대로 좋아서 장사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전쟁 상황이 불리해져서 어차피 살아 돌아갈 수 없을 바에야 하고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매일 밤 위안소를 드나들면서, 일본 이름이 미사오라는 조선 여성을 상대로 했습니다. 그녀는 종군 간호부가 된다고 해서 응모했더니 위안소에 집어 넣어버리더라, 너무나도 슬프고 분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도망을 쳐서라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 되돌아가고 싶다고 울면서 하소연했습니다. 저는 그때가 되서야 비로소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강제로 끌려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쟁터에서의 강간은 일상적이고 다반사였습니다. 일본군은 중국을 치안 지구, 일본 치안 지구, 적세(敵勢) 지구의 셋으로 나누었는데 치안 지구는 까다롭고 처벌이 있었기 때문에 강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적세 지구에 들어서면 상관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강간은 실컷 할 수 있었고 병사들은 여자만 찾아내면 강간을 반복했습니다. 당시 중국인들을 열등하게 보면서 짱꼬로라고 불렀습니다. 짱꼬로 여잔데 나쁠 게 뭐 있나, 어차피 죽일건데 하면서 강간을 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돼지우리로 도망을 가서 오물이나 대변을 옷에 찍어 바르고는 벌벌 떨고 있는 여성을 벌거벗겨서 강간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전쟁의 실태를, 창피를 무릅쓰고 증언합니다."

▼일본이 위안소를 설치한 이유와 정부의 책임▼

천황을 비롯한 일본 정부, 군부는 헤이그조약 등의 국제법, 국제관습법으로 위안소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국제법이나 위안부 문제 전문가들과 대학 교수들이 전문가 증인의 입장으로 법정에서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일본군은 침략한 지역에서 잇따라 위안소를 설치했을까. 판결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37년 7월 일본은 중국에로의 전면 침략전쟁을 개시, 그 첫 시작이 난징(南京)공격입니다. 백만 명 이상이 동원되어 살인, 성 노예, 약탈이 행해진 소위 난징대학살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국제적인 비판을 받자, 중국 점령의 걸림돌이 되었던 일반 부녀자들에 대한 강간을 줄인다는 것이 그 목적 중의 하나였습니다.위안소는 중국 전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각지에도 조직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이 성 노예의 제도화입니다."

천황은 위안소나 난징대학살의 실태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판결은 천황이 알고 있었다고 단정했다.

"극동 군사재판에서도 웹브판사는 '천황은 난징대학살을 포함해서 병사들의 잔학 행위를 알고 있었으며, 아는 입장에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난징대학살은 세계적으로 보도되어, 이를 걱정한 천황이 매일 보고를 받았다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심리하는 가운데, 재판관 중 한 사람이 "위안소의 위안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싶다"고 질문, 전문가 증인이며 위안부 제도를 연구하는 요시미 요시아키(吉見 義明) 중앙대학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군 병사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열악했으며 병영 내에서의 인권은 완전히 무시당했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어 병사들의 불만은 갈수록 강해졌고 상관들을 향해서 불만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병사들의 위안을 고안해냈다. 스포츠와 같은 건전한 위안, 그리고 교대나 귀환은 생각할 수 없었고, 유일하게 실행된 것이 병사들에게 성적인 위안을 주는 위안소 설치였던 것입니다. 즉 위안소는 병사들의 인권을 생각하지 않는 사상에서 생긴 것입니다."

인권 사상이 없는 병역에서는 여성에 대한 인권 감각도 태어나지 않는다. 판결은 일본 정부의 자세까지도 규탄했다.

"이러한 비인도적인 행위가 국제 조약에 어긋난다는 것을 일본정부는 알고 있었기에 패전 직후 즉각 증거자료를 은멸했다. 므라야마(村山) 내각이 되어서야 겨우 위안소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그러나 범죄이며 국제법 위반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았고 보상 문제도 언급하지 않았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설림했으나, 이와 같이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애매하게 하는 방식은 오히려 생존자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돈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많다."

판결은 마지막으로 "위안부가 육체적, 정신적 학대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부터 해방되고 치유되려면 일본 정부의 성의있는 사죄와 보상이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교과서에서도 제대로 위안소에 대해 설명할 것을 권고했다.

여성국제전범법정은 민중 재판이므로 법적인 구속력은 없으나 터부시해온 천황의 전쟁 책임, 그리고 전쟁 중에 여성을 성 학대한다는 것에 대해 인권이라는 시점에서 국제법을 위반하는 범죄이며 그것을 무시하는 불처벌(不處罰)의 역사까지도 단죄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일본 매스컴의 반응▼

유감스럽게도 인권 감각이 결여된 일본 매스컴들은 이 역사적인 여성국제전범법정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한 여자 가수의 이혼 회견장에는 TV카메라가 쇄도하지만, 법정을 마무리짓는 기자회견장에는 일본의 취재팀들보다 외국의 미디어들이 더 많았다. 일본의 모 유력지는 단 한 줄도 쓰지 않고 무시했다. 일본 매스컴들의 인권 감각이 얼마나 둔감한지를 실증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모리(森)수상의 사적인 자문단체인 '교육개혁 국민회의'는 교육 기본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최종 보고로 제언했다. 전쟁 이전의 국가주의적인 교육을 부정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의 존엄을 존중하고 기본적인 인권을 소중히 해야한다고 노래한 교육 기본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은, 또다시 천황을 중심 축으로 두고 교육의 황폐 현상이나 청소년의 퇴폐 분위기를 도덕적으로 죄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식민지 지배와 남존여비를 비롯해서, 기업들 사이에서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힘으로 억누르고 지배해온 것이 20세기였다. 앞으로의 21세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을 소중히 여기면서 더불어 걷는 파트너쉽의 시대이다. 인권과 평화를 짓밟는 전쟁이라는 잘못을 21세기에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맹세를 새로이 하기 위해서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판결을 뜻깊은 일로 여긴다.

요꼬카와 가즈오 저널리스트(前 교토통신 기자)

(이 글은 국제민주연대의 격월간지 '사람이 사람에게' 제 7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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