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우리문화 색깔찾기

  • 입력 1997년 9월 22일 20시 31분


얼마전 TV방송에서 고대 우리나라 문화의 발자취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통일신라 시대에 동양 최대 규모였던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을 재현해 본 것이나, 석굴암의 건축학적 우수성을 파헤친 프로그램은 나도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특히 석굴암이 당시 불교문화권의 석굴양식을 기초로 했으면서도 신라인 특유의 손길로 더욱 발전시킨 점이라든가 현대 기술로도 쉽지 않은 방습 및 환풍기능을 갖추었다는 점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이런 프로그램이 좀더 자주 방영되어 우리 청소년들이 우리 문화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이 피라미드의 신비에만 몰두하지 말고 석굴암에 대해서도 상상의 날개를 맘껏 펼쳐보았으면 한다. 사실 우리 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에 견주어 결코 손색이 없다. 일본말로 「구다라나이」는 형편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구다라」가 바로 백제(百濟)를 말한다. 구다라나이의 본래 의미는 백제에 없는 물건은 시시한 물건이라는 뜻이다. 또 신라때 장보고만 해도 그렇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데 가보면 지금도 장보고라는 이름이 나온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문화적 유산을 보아도 우리 민족은 문화적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나는 근본적으로 문화를 좋거나 나쁜 것으로 우열을 비교할 성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화란 단지 다를 뿐이다. 외국인과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놓는 물건보다는 다른 엉뚱한 물건에 관심을 더 갖는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과연 문화적으로 우리들 나름의 색깔이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별다른 특색을 찾기 힘들다. 거리에 나가 보아도 가로의 풍경이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다른 나라들과 문화적인 차이를 금방 느끼기가 어렵다. 반면에 우리가 우리보다 못한 나라라고 약간은 업신여기는 동남아 나라들만 가보아도 우리와는 다른 문화적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과거에 우리가 무엇무엇을 세계최초로 발명했느니, 서양보다 몇백년이나 앞섰느니 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현재 우리 문화의 색깔이 있느냐, 우리나름의문화정체성이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미국 NBA 선수들의 옷차림과 운동화를 사고, 그들의 노래를 흉내내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가? 왜 우리나라의 기념품 가게들은 파리를 날리는가? 세계 어디를 가도 일본식 초밥집은 왜 고급식당으로 대우를 받는가? 문화적 특성이 강한 나라의 기업은 든든한 부모를 가진 것과 같다. 기업활동이 세계화되면 될수록 오히려 문화적 차이와 색깔은 점점 더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된다. 전통문화의 우수성만 되뇐다고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정말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문화적인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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