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기자의 시네닷컴]'제이콥의 거짓말'

  • 입력 2000년 9월 21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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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도 같은 사랑을 믿는가. 지난달 EBS에서 방영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카비리아의 밤’을 보고 난 뒤 한동안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다. 창녀인 카비리아는 번번이 그의 등을 치는 남자들에게 속아 넘어가지만 어리석게도 사랑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마리아상이 기적을 낳는다는 동산에 올라 “제발 내 인생을 바꿔주세요”하고 울먹이던 카비리아에게 사랑은 뭐였을까. 혹시 현실에서의 결핍이 구원과도 같은 사랑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낳게 한 것은 아닐런지.

얼마전 18세 이상 미국인 1018명에게 운명적 사랑을 믿는지를 질문한 갤럽의 설문조사 결과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른 대답의 상이함이었다. 연간 2만달러(한화 2200여만원)미만을 버는 사람의 84%가 운명적 사랑을 믿는다고 응답한 반면, 연간 7만5000달러(한화 8300여만원)이상을 버는 이들 중 운명적 사랑을 믿는다는 응답자의 비율은 62%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풍족해질수록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 하긴 ‘뉴욕의 가을’(30일 개봉)에서 잡지 표지모델이 될만큼 이름나고 부유한 레스토랑 주인도 “남녀관계에서 로맨스는 환상”이라고 단언한다.

운명적 사랑이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건, 희망이란 대개 목마른 자의 양식인 듯하다. ‘제이콥의 거짓말’(23일 개봉)에서 2차 대전 때 지옥같은 게토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소유가 금지된 라디오를 갖고 있으며 독일군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해줄 소련군이 근처에까지 왔다는 우연한 제이콥의 거짓말을 철썩같이 믿는다.

제이콥이 희망의 뉴스를 전파한 며칠 동안 게토에서는 줄을 잇던 자살이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이콥의 말이 결국 거짓임을 알게 된 그의 친구는 “상상의 라디오 때문에 내 삶이 며칠 연장됐다”며 기어이 목을 맨다. 감자가 없어도, 자유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희망이 없이는 그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뉴욕의 가을’에서 부자는 “사랑 따윈 없다”고 잘라 말하지만 불치병으로 죽게 된 연인의 운명 앞에서 사랑 ‘따위’ 때문에 오열한다. 잃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일까. 왜 항상 각성은 뒤늦게 찾아오는 것인지…. 사랑 혹은 희망 따위를 진부하다고 여기는 냉소적 제스처를 서서히 배워가는 요즘, 그 진부함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영화속 주인공들이 말을 걸어온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현대인의 세련된 냉소보다 차라리 희망에 목을 거는 목마른 자의 편에 서자고.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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