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화된 입맛, 몸이 못따라가… 소형차로 200km 밟는셈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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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안의 시한폭탄 대사증후군]<1>유난히 발병률 높은 한국

“대사증후군요? 소화불량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장염인가요?”

길 가는 일반인 10명에게 대사증후군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정확하게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이 정도로 대사증후군은 아직 일반인에게 낯선 개념이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인식도 낮다.

복부둘레, 중성지방, 혈압과 같은 대사증후군의 위험요소는 심각한 질병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사증후군 위험요소를 3개 이상 함께 가지고 있으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고 입을 모은다.

○ 대한민국, 대사증후군 위험국

세계 의학계는 한국을 대사증후군 비정상 국가로 보고 있다. 비만율은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이웃나라처럼 서구보다 낮은 편이다. 하지만 유독 대사증후군 환자는 서구 선진국 수준에 육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와 고려대의료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 데이터베이스(DB)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지난해 한국의 대사증후군 발병률(23.2%)은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발병률(25∼35%)과 맞먹는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13%대, 중국은 12%대로 한국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한국은 대사증후군 위험요소 1, 2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주의군도 50.1%에 이르렀다.

성별로 보면 여성의 발병률(18.2%)이 남성(27.4%)보다 낮고, 해마다 조금씩 줄어드는 점이 눈에 띈다. 다이어트를 하면서 몸매를 관리하려는 여성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김신곤 고려대 안암병원 교수(내분비내과)는 한국의 특이성을 과속 질주하는 소형차에 비유했다. 김 교수는 “우리 국민은 서구인들처럼 육류를 많이 먹지만 대사능력은 그들보다 떨어진다. 마치 1200cc 소형차를 타고 시속 200km로 달리는 격”이라며 “한국인의 식습관은 이미 동양인의 체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서구화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사증후군에 걸린 것으로 판정되면 개별 질병에 걸릴 개연성이 크게 높아진다. 대사증후군을 언젠가 폭발할 ‘몸속의 시한폭탄’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당뇨는 일반적으로 공복혈당이 기준치인 dL당 126mg을 넘으면 걸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사증후군 환자는 공복혈당이 100mg 이상만 돼도 위험할 수 있다. 고지혈증도 마찬가지다. 통상적인 발병 기준은 중성지방이 dL당 400mg 이상이지만 대사증후군 환자는 150mg만 넘어도 각종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다.

김선미 고려대 구로병원 교수(가정의학과)는 “대사증후군 위험요소는 지속적으로 체내에 염증 반응을 일으켜 동맥경화 같은 심뇌혈관 질환의 위험에 계속 노출된다”며 “대사증후군을 몸속에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터진다는 생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몸속 지방 감소가 최고 예방책

[내 몸 안의 시한폭탄 대사증후군] 유난히 발병률 높은 한국
대사증후군은 암 당뇨 심뇌혈관 등 ‘만성질환의 뿌리’로 지목되고 있다. 선진국은 미래 질병 대책의 열쇠를 대사증후군 관리로 설정해 놓았다. 위험성이 크지만 초기에 잘 관리하면 중증질환 발생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와 고려대의료원의 시뮬레이션 결과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확인됐다. 대사증후군 위험요소 4개 이상을 지닌 환자의 수치를 모두 정상 수준으로 떨어뜨려봤다.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이지만 이렇게 하면 연간 심혈관 질환 사망자를 34.4%까지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실에 맞게 위험요소를 3개 이상 가진 사람을 2개로 떨어뜨려 보니 심뇌혈관 질환 사망자가 23% 줄었다.

환자 수를 줄이면 급속하게 다가오는 초고령사회의 의료비 부담도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심뇌혈관 질환 사망자를 23% 낮추는 노력을 하면 10년 뒤 이 질환에 들어가는 건강보험 재정을 약 20%까지 줄일 수 있다.

윤석준 서울시대사증후군관리단장(고려대 의대 교수)은 “현재 정부의 보건정책은 병이 난 뒤에 의료비를 지급하는 방식”이라며 “하지만 사후약방문으로는 고령화시대의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사증후군을 국가가 집중 관리해서 선제적으로 만성질환 발병률을 떨어뜨리는 정책이 절실한 때”라고 주문했다.

대사증후군을 일으키는 가장 큰 주범은 몸속 지방이다. 지방이 지나치게 쌓이면 인슐린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인슐린 저항성이 생겨 혈당이 증가하고 이는 동맥경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지방조직에서 분비되는 대사 조절물질의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런 변화들은 모두 당뇨 암 심뇌혈관 질환의 위험성을 증가시킨다.

대사증후군을 예방하려면 생활습관 개선이 가장 중요하다. 육류, 고열량 고지방의 인스턴트식품, 단 음식, 탄산음료 등을 피해야 한다. 탄수화물 섭취는 전체 식사 칼로리의 50% 미만으로 낮추는 것이 좋다. 흰쌀 같은 다당류 탄수화물보다는 도정하지 않은 곡류인 현미, 잡곡밥을 먹으면 도움이 된다.

꾸준한 운동도 필수다. 주로 뚱뚱한 대사증후군 환자들은 뛰기보다는 1주일에 150분 이상 땀이 날 정도로 걷는 것이 좋다. 근육운동을 병행하면 혈압개선, 콜레스테롤 감소에 효과적이다.

최경묵 고려대 구로병원 당뇨센터 교수는 “대사증후군을 잡는 것은 ‘저비용 고효율’로 만성질환에 대비하는 지름길”이라며 “특히 복부에 지방이 많은데도 겉으로는 말라 보이는 사람일수록 대사증후군에 더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日은 관리 1년만에 40만명 혈당-중성지방 정상으로 ▼

의료진 상담-건강관리비 지원

대사증후군 관리는 ‘저비용 고효율’ 정책이다. 고령화사회의 노인 만성질환 유병률을 떨어뜨리고 의료비 폭탄을 막기 위해 선진국이 대사증후군 관리에 적극적인 이유다.

가장 앞선 국가는 일본이다. 국립보건의료과학원이 표본환자를 모집해 관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먼저 대사증후군 위험요인을 3개 이상 가진 그룹(적극적 지원군)은 의료진이 1년에 두 번 만난다. 또 전화나 e메일을 이용해 5회 정도 건강 상담을 한다. 개인별 식이요법이나 운동 프로그램을 알려주고 6개월에 한 번은 건강관리비로 50만 원 정도를 지원하기도 한다. 위험요인이 2개인 그룹(동기부여 지원군)은 의료진이 1년에 한 번 만나고 이와 별도로 전화나 e메일을 통한 상담 기회를 한 번 더 만들었다.

특히 40만 명이 참가한 2008년의 프로젝트 결과는 놀라웠다. 시행 1년 뒤인 2009년 복부둘레, 공복혈당, 혈압, 중성지방, HDL 콜레스테롤을 측정해보니 수치가 모두 개선됐다. 참가자 40명의 평균 중성지방이 약 11.3%, 공복혈당이 6.0% 감소하면서 정상으로 돌아왔다. 평균 체중은 64.9kg에서 62.9kg으로 3%가량 줄었다.

한국도 대사증후군 관리를 통해 만성질환 유병률을 낮추는 정책을 2009년부터 적극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의 대사증후군관리단은 2011년부터 약 5000명의 환자를 관리 중이다. 참가자는 3개월마다 운동 처방과 영양 및 건강 상담을 받고 대사증후군 수치를 측정했다. 사업 시작 뒤 1년 6개월이 지나자 참가자 51.5%의 대사증후군 위험요소가 2개 이하로 줄어들었다.

윤석준 서울시대사증후군관리단장은 “대사증후군은 구체적인 수치로 자신의 위험도가 그대로 드러나므로 관리하기가 쉽다. 국가가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하면 미래 의료비 재앙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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