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6>

  • 입력 2009년 9월 8일 14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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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하셨습니까?"

주치의가 석범 곁에 서서, 헐떡이는 앨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벌써 이곳까지 실려 온 환자 둘을 잃었다. 마지막 환자까지 저승으로 보내고 싶지 않은 바람이 굳은 표정에 묻어났다.

순간순간 상황은 나빠지고 있었다. 시간이 곧 생명이었다. 수술을 통해 확보 가능한 부위는 뇌를 포함해서 전체의 5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95퍼센트를 기계몸으로 채우는 것이니, 설령 앨리스가 살아난다고 해도 특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지는 못할 것이다. 응급환자가 95퍼센트 이상 기계몸을 채워야할 때는 반드시 본인이나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주치의는 앨리스가 위급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정한 보호자가 바로 은석범이란 사실을 어제 그에게 통보했다. 석범은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그만큼 앨리스에게 석범은 특별한 존재였다.

"이대로 두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듭니다. 화상을 입은 부위의 감염을 막기 어렵습니다."

"좋습니다. 수술에 동의하겠습니다."

석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앨리스가 평소에 즐겨 쓰던 말이 귓전을 울려댔다.

검사님, 전 말이죠. 죽었으면 죽었지 90퍼센트 이상 기계몸에 의지하여 목숨을 잇고 싶진 않아요. 그게 어디 사는 건가요?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게 낫죠.

그때 맞장구를 쳤던가. 아니면 신중하라고 충고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앨리스를 살려놓는 게 옳을까. 앨리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통나무집의 비밀을 알고 싶어 수술에 동의하는 건 아닐까.

주치의의 질문이 빨라졌다.

"사망신고 후 새로 넘버를 부여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망신고 없이 쓰던 넘버를 계속 쓰시겠습니까?"

올해부터 90퍼센트 기계몸을 넘는 사이보그는 양자택일이 가능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완전히 새 출발을 하는 길이 하나고, 인간이기를 고집하며 연속성을 갖는 길이 또 다른 하나다. 후자를 택한다고, 인권이 계속 부여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특별시연합법원에서 90퍼센트 이상 사이보그가 요청한 '인권'을 받아들인 경우는 1퍼센트도 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밀어 넘긴 석범이 답했다.

"사망신고를 하겠습니다."

석범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관악산 화재로 인해 중상을 입은 부상자 3명이 모두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찰스도 이 소식을 들었을 것이고, 더 이상 암살자를 보낼 궁리를 하진 않을 것이다.

석범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크리스탈 병원과의 핫라인을 제외한 모든 링크를 끊었다. 찰스에게 고급정보가 줄줄줄 새어나가는 지금은 보안청도 안전한 곳이 못 된다. 물론 그의 숙소에도 도청 장치가 깔렸을지 모른다. 석범은 저녁도 건너뛰고 두 시간 남짓 도청 의심 부분을 하나하나 확인한 뒤 도청 방해 전파까지 쐈다.

그리고 링크를 끊기 전에 저장된 동영상 메시지를 열었다. 가장 최근에 메시지를 남긴 사람은 예상대로 노민선이었다.

꽁꽁 숨겨둔 비밀을 고백했으니 마음이 편치 않겠지. 너무 많이 너무 애매하게 털어놓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손톱을 물어뜯었을 거야.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나와의 끈을 이어야겠다고 판단했겠지. 사랑이든 아님 자기보호를 위한 전략이든, 최볼테르와 노민선을 분리시키고, 노민선의 명예를 지켜줄 이는 은석범 검사뿐이니까.

민선은 샌드위치 주차장을 배경으로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섰다. 양볼은 여전히 핼쑥했지만 짙은 눈 화장 덕분인지 슬픔을 찾긴 어려웠다.

"아직도 나 때문에 화 많이 났어요? 최교수의 비밀을 미리 알리지 못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우린 '배틀원 2049'에서 우승하고 싶었어요. 그때 사실을 털어놓았다면, 석범 씬 최교수를 체포했을 테고, 그럼 우린 경기에 나설 수 없었을 테죠. 워낙 기인으로 유명했던 까닭에 최교수가 이것저것 엉뚱한 짓을 해도 다 글라슈트를 위해서려니 했답니다. 당분간 달섬에 가 있을 게요. 마음이 정리되면, 정리되지 않더라도 꼭 와요. 와 줄 거죠? 기다릴 게요."

그리고 차에 오르려다 말고 고개만 돌려 입술을 과장스럽게 벌려 글자 넷을 차례차례 뱉었다.

사, 랑, 해,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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