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30>

  • 입력 2009년 7월 6일 14시 01분


위험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때론 그 위험을 향해 다가가야 할 때도 있다. 그냥 무턱대고 다가가다가는 중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다. 다가가면서, 연구해야 한다. 이 위험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또 이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어디서부터 왜 해야 하는가. 위험에 닿을 때까지 그 답을 찾으면 위험을 제거하고 살아남겠지만, 위험에 닿고서도 답이 없을 때는 참혹한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깨로 밀치고 들어가려다가 제지당하자, 민선이 고개를 돌려 석범을 쳐다보았다. 석범은 시선을 슬쩍 비끼며 매부리코 형사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더딘 게야? 아직도 사체를 확보 못했어?"

"그게…… 정밀 진단을 했지만 슈트 안까지 살피지는 못했습니다."

"경호 로봇팀이 자랑하는 폭발물 제거 로봇은 뒀다 뭐하려고?"

"그게 진동 0.2 카인(진동의 단위, cm/sec) 이하로 움직이는 로봇은 그 값이 만만치 않아서 특별시장의 허락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헌데 시장은 로봇을 쓰는 건 좋지만 건드렸다가 폭발이라도 하면 보안청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곧 청 자체를 스스로 없앤다는 뜻이다.

"경호로봇팀도 주저한단 말인가?"

"아시잖습니까? '로보 사피엔스'니 뭐니 해가며 로봇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떠들었지만 범인 검거율은 다른 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번에 또 실패하면 경호로봇팀 자체가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검사님! 이 짐을 혹시 지시겠다고 나서진 마세요. 폭발물 제거는 어디까지나 경호로봇팀 소관입니다. 아셨죠?"

석범은 즉답 대신 윗옷을 벗고 바지까지 내렸다. 방탄은 물론 방해 전파와 소음 방지를 위해 특별 제작된 회색에 푸른 줄무늬 속옷이 드러났다. 보안청에선 이 속옷을 '아우슈비츠'라고 칭했다. 폭발물 제거를 위해서는 깃 하나 단추 하나도 조심해야 한다.

"안돼요."

석범을 막아선 이는 민선이었다.

"꼬박 2년 폭발물 제거 훈련을 받았지. 간단한 일이야. 20분 아니 30분, 넉넉잡고 1시간 안에 끝나."

그가 민선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두 형사가 석범의 몸에 폭발 제거용 장비들을 차례차례 부착했다. 54미터 상징탑 꼭대기까지는 찰스 전용 엘리베이터가 준비되어 있었다. 인천공항 만큼 독창적이진 않지만, 부드럽게 휘어지는 나선형 궤적이 멋지다고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진동 때문에 이 엘리베이터도 사용할 수 없었다. 레이저빔 장착 안경을 쓴 석범은 다시 민선을 향해 윙크를 한 후 비상용 사다리를 통해 상징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속도는 느렸다.

한 걸음 떼고 꼭대기 상황을 확인받고 또 한 걸음을 옮기는 식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귓불을 후려쳤고 그때마다 탑 전체가 휘청대며 몸을 낮추었다.

"그럼 이제 하나 남은 건가?"

노윤상 원장까지 죽었으니, 앵거 클리닉에 참여한 환자 중 생존자는 최 볼테르 교수뿐이다. 앨리스를 데려오지 않고 경기장에 남긴 것도 볼테르를 감시하고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40미터에 닿자 잠시 쉬었다.

손목도 아리고 허리도 편치 않았다. 토네이도 강철구두를 작동하면 3초 안에 오를 거리를 10분이나 소모했다.

문명의 이기에 기대지 말고 맨몸으로 다가오라! 이것이 살인자의 바람일까.

앨리스로부터 연락이 왔다. 뇌 마우스를 클릭하여 접속하자, 그녀의 음성이 곧바로 뇌에 닿았다.

"최 교수는 글라슈트와 함께 일단 SAIST 연구소로 돌아갔습니다. 노 원장의 사망에 충격을 받은 듯 굳은 표정이었지만,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근데 상징탑을 꼭 혼자 오르셔야 합니까? 모험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항상 제게 충고하신 분이 누굽니까? 검사님! 조심하세요."

"이리로 올 생각 마. 연구소에 진드기처럼 붙어 있어. 최 교수를 놓치면 혼날 줄 알아. 팀원들만 아는 비밀 연구소를 꼭 찾아내야 해."

석범은 접속을 끊고 숨을 골랐다. 폭발물 의심 물체로부터 반경 10미터 이내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특별수당이 책정되었다. 사망 가능성이 10미터 밖보다 100배 이상 가파르게 상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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