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25>

  • 입력 2009년 6월 29일 14시 02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시험이 있다. '빨리 끝났으면' 하는 시험과 '하루만 더 연기됐으면' 하는 시험. 슈타이거와 글라슈트에게 4강전은 서로 다른 시험이었다. 글라슈트는 '하루만 더 연기 됐으면'하는 마음으로 경기장을 찾았지만, 슈타이거에겐 '빨리 끝났으면' 하는 시합일 뿐이다.

'시합의 긴장감'이 견디기 힘들만큼 커서도 아니고, 시합 후에 따뜻한 목욕과 숙면이 그리워서도 아니다. 마틴 구레츠키의 머릿속이 온통 '결승전'으로 가득 찬 탓이다.

누가 보아도, 구레츠키 박사와 노련한 슈타이거 팀은 4강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글라슈트에 대한 분석은커녕, 몇몇 부품은 결승전을 위해 아껴두고 연습용 부품을 끼우기도 했다.

경기 당일 느지막하게 경기장에 와서 기자 인터뷰를 하고 오후 6시가 넘어서야 마지막 점검에 들어가다니! 슈타이거 팀은 8강전까진 이런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결국 게임은 슈타이거와 무사시, 졸리 더 퀸, 이렇게 3파전이 될 거라는 언론의 진단과 슈타이거 팀의 판단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노보 중계방송 팀은 4강전 중계를 준비하느라 전날 밤부터 분주했다. 4강전부터는 12대의 카메라가 30도 간격을 두고 360도 전 방향에서 동시 촬영한 후 실시간으로 연속 편집해 보여주는 새로운 기법을 처음 시도할 예정이었다. 또 4대의 카메라가 천장에서 풀샷으로 경기장 안팎은 물론 격투 장면을 빠짐없이 찍을 예정이기 때문에, 보노보의 중계 담당 로봇들 사이에서도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들에게 '긴장'이라는 모드가 있다면.

경기 시작은 밤 9시 30분. 하지만 보노보는 8시부터 4강전 중계방송을 내보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광고만 해도 125개. 돈 잔치나 다름없는 빅 매치였다. 보노보에게 이번 시합은 '한번만 더 치렀으면' 하는 시험일까.

보노보는 모든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짧게 재방영했고, 특히 슈타이거와 글라슈트가 치른 토너먼트 경기를 긴박감 넘치게 편집해서 보여주었다. 각 로봇의 전력을 다각도로 분석한 후 결과를 예측하는 코너도 빠지지 않았다.

로봇 격투기 평론가들은 글라슈트가 M-ALI와의 8강전 경기 초반에 보인 이상행동을 불길한 징조로 해석하는 분위기였다. 아직 원인이 명백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중앙제어시스템'이나 '림조절장치'(Limb control Processor)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특히 슈타이거처럼 '빠르고 날렵한 공격'이 장기인 로봇과의 격투에선, 이런 불규칙한 행동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꼽혔다.

사라가 어젯밤 마지막 점검 때 집중적으로 훑어본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하루만 더 있었어도, 몸통을 아예 뜯고 다시 조립을 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점검'을 여러 차례 하는 정도로 마무리 지었다. 점검 리스트 'Question 278' 중에 23개가 '중앙제어시스템'에 대한 항목이고, '림조절장치'에 관한 항목도 19개나 됐다. 하지만 글라슈트는 이상이 없었다. '자동 심화점검 135'에서도 전체 항목이 '아무 문제 없음'으로 나왔다.

"그럼 됐어. 이제 슈타이거에게 파워 니킥을 멋지게 한 방 먹이는 일만 남았군. 그저께 마무리했던 이번 경기 '작전'을 잠깐 확인만 해볼까요?"

볼테르가 사라와 민선을 번갈아 보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에게 이번 시합은 '빨리 끝났으면' 하는 시합일까.

"확인이랄 게 뭐가 있어요. 말씀하신 대로 꺽다리와 뚱보가 이미 프로그램을 다 끝마쳤어요. 녀석이 워낙 돌려차기가 좋으니까, 회전속도가 1800 rpm 이하인 킥이나 돌려차기는 일부러 계속 맞아주는 척 하다가, 그 이상의 킥이 들어오면 갑자기 반대방향으로 몸을 135도 기울여 곧바로 플라잉 니킥을 가하는 거예요. 이번 경기에선 바디 블로도 많이 쓸 거구요."

민선이 사라의 명쾌한 설명에 맞장구를 쳤다.

"치명적인 프라잉 니킥! 그걸로 끝이죠."

세 사람이 경기 전 마지막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동안, 글라슈트는 늠름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전을 이미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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