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99>

  • 입력 2009년 5월 24일 14시 14분


제6부 나는 천 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을 갖고 있다

제21장 지하통로에서 생긴 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앨리스는 비웃었다. 상대방에 집중하면 눈을 아무리 깜짝거려도 추격할 수 있다고 믿은 탓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누군가를 놓치는 일이 생겼다. 평생 후회할 순간이었다.

앨리스는 석범과 함께 SAIST 차세대로봇연구소로 달려갔지만 최 볼테르를 만나지 못했다. 볼테르뿐만 아니라 글라슈트 팀까지 동시에 사라졌다. 팀원 전체가 급습을 당한 후 '베틀원 2049' 주최 측의 양해를 얻어 비밀 연구소로 숨은 것이다.

석범은 앵거 클리닉의 또 다른 생존자 방문종부터 찾기로 했다. 노윤상 박사가 알려준, 방문종이 자주 나타난다는 지하통로로 성창수와 지병식을 급히 보냈다. 그리고 앨리스에게 따로 명령을 내렸다.

"남 형사! 눈도 깜짝 하지 말고 철저히 미행해. 알겠지 내 말?"

미행? 제기랄!

눈도 깜짝 하지 말라고? 미친!

앨리스는 까마귀 빌딩 지하로 내려가며 계속 욕을 삼켰다. 매일 얼굴 맞대는 동료를 은밀히 감시하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지하주차장 구석에 놓인 녹슨 철사다리를 통해 더 아래로 내려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구린 짓을 하는 놈들은 지하를 좋아한다. 10년 전 까마귀 빌딩과 한강을 오가는 지하철이 폐쇄된 후부터 이 통로는 부랑자들의 천국이 되었다. 다음 희생자가 볼테르와 방문종 둘 중 하나라면, 볼테르가 팀원들을 이끌고 비밀 연구소로 숨어버렸으니 방문종 쪽에서 일이 터질 가능성이 컸다.

이 지하통로에서 패싸움이 붙어 열두 사람이 죽어나간 것이 재작년 크리스마스이브다. 그때부터 특별시 정부는 지하통로의 부랑자들을 체포하여 지상으로 올려 보내겠다고 천명했다. 지하통로는 보안청 직원이 내려오는 단 하루만 거룩한 안식일처럼 텅 빈 채 고요했으며, 나머지 엿새는 저마다의 이유로 지상 생활을 접은 이들의 변함없는 안식처였다.

사다리 끝에서 바닥까진 5미터 남짓 거리가 있었다. 앨리스는, 이 정도 쯤이야, 웃으며 가볍게 양손을 놓았다.

"어이쿠!"

바닥을 굴렀다. 먼지 앉은 노란 등이 30미터 간격으로 반짝였지만 바닥에 깔린 자갈돌까지 비추기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발목을 삔 것 같진 않다. 그렇지만 보안청의 어여쁜 날다람쥐 남앨리스 형사가 5미터를 뛰어내리지 못해 나뒹군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의 틈들을 천천히 노려보았다. 보안청에서 숙지한 지하통로의 행동수칙이 떠올랐다.

항상 고개를 들 것, 틈마다 부랑자들이 숨어 있다고 간주할 것, 무조건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할 것.

눈동자들이 반짝이는 듯도 했다. 10년 전만 해도 지하철이 쌩쌩 달리던 길을 당당하게 걷는 이는 보안청 직원들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틈틈이 박혔다. 지상에서도 숨고 지하에서도 숨어야만 하는 인생들이다.

-300미터 전방이야.

석범의 목소리가 바로 측두엽에 닿았다. 홀-코클리어 임플랜트(Whole-Cochlear Implant)를 끼면, 음파가 고막을 울리지 않고 곧바로 전기신호로 바뀌어 측두엽 1차 청각영역으로 전달된다. 소리가 대뇌에 인지되는 것이다.

앨리스는 벽에 등을 대고 빠르게 옆걸음으로 나아갔다.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졸졸 들려왔다. 봉쇄한 지하통로 사이에 폐쇄된 역은 모두 다섯 개고 역마다 다섯 대의 로봇이 배치되어 있다. 그들은 보안청 직원이 없는 엿새 동안 지하통로를 돌며 정상적이지 않은 움직임을 포착하여 동영상과 함께 특별시 보안청에 보고한다. 그러나 동영상에 부랑자들이 찍힌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도둑고양이나 개 간혹 시궁쥐다.

5번 역이다. 지하통로가 폐쇄되면서 지명을 땄던 이름도 숫자로 바뀌었다.

멀리 '5'라는 숫자와 함께 로봇 두 대가 지하통로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앨리스는 한 마리 도마뱀처럼 양손과 양발을 벽에 붙인 채 천장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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