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70>

  • 입력 2009년 4월 13일 13시 09분


누구에게 숫자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또 누구에게 숫자는 목숨보다 귀중하다.

앨리스는 사라가 쉼 없이 달릴 만한 곳을 모두 뒤졌다. 운동장은 물론이고, 빌딩과 빌딩을 이어 만든 스카이 산책로와 폐쇄된 지하철 선로를 리모델링한 일명 '두더지굴'까지 조사한 다음에야 강변으로 나갔다.

"83퍼센트임을 자랑하는 겁니까? 달리지 않아도 충분히 튼튼한 몸 아닌가요?"

앨리스도 23퍼센트가 기계몸이다. 그러나 83퍼센트와 20퍼센트의 차이는 63퍼센트에 머무르지 않는다.

"87퍼센트예요!"

"뭐라고요?"

"부엉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 천연몸 4퍼센트를 더 잃었어요. 이제 3퍼센트 남았네요."

뒷맛이 쓸쓸하고 슬펐다.

기계몸이 90퍼센트에 이르면 특별시 위생청에 출석하여 정밀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특별시민권을 계속 부여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 부적합 판정을 내려 특별시민권을 박탈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열에 아홉은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므로, 기계몸이 80퍼센트를 넘어가는 이들은 질병이나 부상을 무척 조심했다.

"부엉이 빌딩 테러에 관해서라면 진술을 마쳤습니다."

사라는 눈길을 주지도 않고 사무적으로 답했다. 운동을 방해받기 싫은 것이다.

"오늘은 딴 일 때문에 왔습니다. 아, 긴 시간 빼앗지 않을 테니까, 건들건들 대지 말고 서서 얘기 합시다."

그래도 사라는 품 밟기를 멈추지 않았다. 앨리스가 활개짓을 하는 사라의 오른 팔목을 잡아 쥐었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사라는 살짝 왼 발 뒤꿈치를 들었다. 보안청 특공무술을 5년 넘게 연마한 앨리스가 오른 무릎으로 사라의 왼 무릎을 가볍게 쳤다. 중심을 흔들어 사라의 발차기를 미리 막으려는 것이다.

"나중에 한 판 제대로 붙읍시다. 87퍼센트든 99퍼센트든 난 상관없어!"

보안청 내규에는 50퍼센트 이상 기계몸을 지닌 상대를 제압할 때는 무술 대신 총기류를 사용하라는 권고 조항이 있었다. 기계몸의 괴력은 특공무술로 단련된 보안청 형사들도 상대하기 벅찬 것이다. 그러나 약이 바짝 오른 앨리스는 보안청 내규 따윈 무시했다.

"변주민 알죠?"

사라가 품 밟기를 멈췄다.

"모른다고 잡아 뗄 생각 말아요."

앨리스가 말을 끊고 사라의 표정을 살폈다.

"'알람'에게서 무슨 얘길 들었는지 모르지만, 전부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이라뇨?"

"직접 물어보세요."

아직 피살 소식을 모르는구나.

앨리스는 한 박자 숨을 골랐다. 뉴스가 흘러넘치는 세상이지만,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뉴스를 접하지 않는 이들도 가끔 있었다. 글라슈트에 미친 사라도 그 중 하나였다.

"'알람'이 로봇 파손범인 건 아시나요? 달링 1호부터 3호까지, 나오는 족족 사들여 갈기갈기 찢어놓았죠. 지금은 신제품 4호와 살지만, 5호가 나오면 4호도 1호부터 3호처럼 처참하게 버려질 거예요."

사라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말끝에 담긴 분노를 감추진 못했다.

"로봇파손 및 유기죄로 앵거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은 사실은 확인했습니다만, 거짓말이란 건 무슨 소립니까?"

사라는 오가는 시민들을 흘끔 곁눈질했다. 대로변에 서서 나눌 이야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 '인공섬 12호'와 연결된 구름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앨리스도 서둘러 뒤따랐다.

돌로 층층이 쌓은 3층 성벽을 오르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앨리스는 자주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인 채 헉헉거렸다. 섬 곳곳에 붐비던 특별시민들도 성벽 근처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잉카의 도읍지 꾸스꼬의 삭사이와망 성벽을 잉카인의 공법에 따라 지으면서 자연환경까지 재현한 것이다. 문제는 공기였다. '지구의 배꼽' 꾸스꼬가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탓에 산소가 희박했고, 고산증세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앨리스도 노약자와 임산부, 어린이의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을 읽기는 했다. 그러나 3천 미터 이상 올라간 적이 없는 그녀였기에 평소처럼 빠르게 걷다가 숨이 턱 막힌 것이다.

사라는 이미 몇 차례 삭사이와망 성벽에 와본 듯 걸음을 늦추며 호흡을 조절했다. 달리기를 즐기는 시민들도 성벽 1층 언저리까지는 용기를 냈지만 2층을 지나 3층까지는 오르지 않았다. 드디어 둘만 남았을 때 사라가 답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앨리스가 숨을 고른 후 답했다.

"알아요. 바디 바자르에서 춤추는 거 나도 봤……"

"그것 말고 딴 거."

"……혹시 불법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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