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과거 없는 오늘의 공허함… 그대, 추억이 필요한가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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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란 기억을 부수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을 밑그림으로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재조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같은 꿈을 이루어내는 일에 이미 많이 실패해버렸습니다.” ―해질 무렵(황석영·문학동네·2015년) 》

소설에서 한 건축가는 도시 재개발 사업이 기존 건축물을 제거해 버리는 데만 급급하다고 지적한다. 새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낡은 집들의 특성, 그곳에 자리 잡은 문화를 어느 정도는 반영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도 건축가가 말하는 재개발 사업을 닮았다. 이들은 과거를 부정하거나 망각한 채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만 질주한다. 과거를 추억할 여유가 이들에게는 없다.

주인공인 60대 중반의 건축가 박민우는 고향인 산동네 ‘달골’에서의 기억을 애써 잊는다. 휴대전화에 ‘잠금 설정’하듯 달골의 친구도, 옛사랑 차순아도 차단해 버린다. 20대 후반의 여성 연극인 정우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이 그저 희미하다’고 말한다. 결혼은 포기하고 산다고 한다. 20대에 어울리지 않는 노색(老色) 짙은 말이다.

박민우가 과거를 굴착기로 밀어버리듯 기억 속에서 지운 이유는 과거가 창피해서, 과거에 분노해서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을 깨끗하게 제거하고 유학파 스타 건축가로 당당히 살고 싶었던 것이다. 정우희가 과거를 잊은 이유는 좀 다르다. 그녀는 굶어가며 시나리오를 쓰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뛰어도 월세 내는 것조차 버거워 과거를 떠올릴 여유가 없다.

추억 없이 살던 이들에게 남는 건 공허함이다. 박민우는 60대 후반이 돼서야 옛사랑의 편지를 받고 새삼스럽게 과거를 되짚어보며 달려온 길이 다 폐허임을 깨닫는다. 연락을 끊은 옛사랑은 삶의 나락으로 떨어졌고, 사랑 없이 결혼한 가정은 거의 파탄이 났다.

소설은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 주변 누군가의 모습과 닮았을 인물들을 보여주며 스스로를 돌아보길 권하는 듯하다. 달려온 길이 다 폐허이진 않은지, 또 다른 폐허를 안 남기려면 어찌 해야 할지 자문해 보라는 듯이 말이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해질 무렵#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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