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우리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8>…간도 영토의식

입력 2004-05-27 19:13수정 2009-10-09 21:51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옌지시에 있는 옌벤 조선족자치주 박물관의 자치주 창립 50주년 성과전람전 입구, 머리말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전국의 모법 자치주로 부상할 그날을 위해 분투 노력하자!'고 쓰여 있다.
《옌지(延吉)에서 만난 조선족 엘리트 청년 A씨는 취재팀이 단군을 아느냐고 묻자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관광가이드인 조선족 B씨 역시 룽징(龍井)의 대성중학 옛터나 윤동주 생가, 용두레 우물은 알지만 고구려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지안(集安)에서 취재팀의 길안내를 했던 조선족 C씨는 둔화(敦化) 류딩산(六頂山)의 발해묘군을 지나치며 “발해가 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서 부끄러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우리는 중국에 시집온 며느리’

‘한민족공동체와 중국조선족사회’라는 옌볜대 방수옥 교수의 논문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조선족학교를 다니더라도 초등학교 1학년부터 12년 동안 우리 민족사에 대해 공부하는 분량은 2.5페이지 1000여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

이제 간도의 조선족들에게 민족은 무엇이고 간도는 무엇일까. 조선족들이 흔히 말하는 ‘며느리론’에 그들의 복잡한 처지가 함축돼 있다. ‘며느리론’이란 조선족은 중국으로 시집 온 조선의 딸이라는 이야기. 사위가 아닌 며느리, 조선의 아들이 아닌 조선의 딸이라는 표현엔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사회에 동화하고 싶은 양면적 심경이 담겨 있다.

“조선족 여성과 결혼해 전통문화를 지키고 싶지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아마도 내 손자들은 나처럼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원을 졸업하면 옌볜을 떠나 상하이(上海)에서 취업하는 것이 꿈인 A씨가 그리는 조선족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 세 부모를 섬겨야 하는 조선족


분단된 조국이 조선족들의 처지를 더욱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조선족사회엔 “우리는 세 부모를 섬겨야 한다”는 말도 있다. 이쪽저쪽 두루 살펴야 하는 조선족들에게 정체성 유지가 얼마나 힘겨운지 느낄 수 있다. 세 부모는 중국, 한국, 조선(북한)이다.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위협은 조선족사회의 인구감소다.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비율이 1953년엔 63.9%나 됐지만 1996년엔 39.3%로 떨어졌다. 2050년에는 15% 선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조선족 학자들은 추산한다.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 상실과 인구 급감은 영토분쟁 발발시 우리에게 불리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르면 국제법 원칙을 적용하기 곤란할 경우 영토귀속을 판단하는 데 거주민들의 영토의식이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 간도에 대한 뿌리깊은 영토의식


179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 두만강과 토문강원을 뚜렷이 구분해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님을 강조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간도에 대한 우리의 영토의식은 뿌리가 깊다. 양태진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장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간도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일구고 살았던 조선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생겼다”고 말했다.

경인교육대 강석화 교수 또한 “조선 초부터 간도에 대한 영토의식이 존재했다”며 “19세기말에 간도문제가 불거진 것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 만큼 조선의 역량이 성장했던 것일 뿐이다”고 주장했다.

청(淸)이 1880년 이후 간도 지역에 대한 봉금(封禁)을 풀고 이 지역 조선인들에게 치발역복(雉髮易服·머리를 깎고 청인의 옷을 입음)과 귀화를 요구했을 때 조선인들이 강력히 반발한 것도 강한 영토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 조선인들의 조직적 집단적 저항

청의 압박이 심해지자 조선인들은 전민제(佃民制)라는 자구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조선인 중 일부가 위장 귀화해 명의상의 지주가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땅을 경작하는 방식으로 청의 감시를 벗어난 것이다. 아예 청의 요구를 무시하고 저항하는 조선인들도 적지 않았다.

중앙 조정에서도 고구려 옛 땅을 되찾자는 고토수복론(故土收復論) 또는 랴오둥(遼東) 수복론이 18세기 말부터 등장한다. 실학자인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할 기회를 잃었다”며 백두산정계비 건립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간도에 대한 영토의식은 우리보다 중국이 훨씬 강하다. 인천대 노영돈 교수는 “청일간 체결한 간도협약이 무효라거나 백두산정계비 내용이 우리 쪽에 유리하다고 볼 객관적인 근거는 대단히 많지만 중국이 영토의식을 제기한다면 아무래도 우리는 수세”라고 진단했다.

● 영토의식을 가둔 헌법 제3조


조선 영조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지도에는 고려시대 윤관이 9성을 개척한 후 경계비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선춘령이 표시돼 있다. 옛 선조들이 개척했던 영토 회복을 주장하며 북방으로 뻗어나가던 조선 영·정조대의 영토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우리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못박고 있다. 동국대 임영정 교수(역사교육과)는 “헌법 제정 당시 간도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결과”라며 “통일 이후에도 이 조항이 존속하면 간도연고권을 주장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제헌 헌법에 왜 이런 반(反)역사적인 조항이 들어갔을까. 노영돈 교수는 “식민사관의 영향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두만강이 천지에서 발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한중일 3국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특히 일본은 발달된 측량술로 조선 영토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간도는 조선 땅이 아니다’라는 의식을 심기 위해 두만강이 천지에서 시작된다고 가르쳤다.”

● 아직도 심각성을 모르는 정부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한 국제법학자는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간도문제에 대한 의견을 전달해도 웃기만 한다”며 “한국이 불리한 문제도 아니고 정부가 나서야 할 일인데 의욕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다. 그는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 교수들 중 상당수가 동북공정 이전부터 간도에 관한 국내 연구동향을 파악해 자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역사학자도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에게 간도문제 연구의 중요성과 지원 필요성을 이야기했지만 반응이 없다”며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북방영토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백산(白山)학회의 신형식 회장(상명대 초빙교수)은 “간도문제 연구에 관한 한 1990년대 이후 답보상태나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 중국과 일본을 배워야 한다

북방영토문제 연구자들은 간도문제가 당장은 해결될 가능성이 없더라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당장 외교협상에서 좋은 카드가 될 수도 있고 통일 후 본격화될 영토분쟁의 명분을 축적할 필요도 있다는 점에서다.

중국이 일본령인 센카쿠(尖閣)열도가 원래 중국 땅 댜오위다오(釣魚島)라며 해상시위를 벌인 것이나 일본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며 계속 분쟁을 일으키는 것도 미래를 겨냥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옌지·지안=특별취재팀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