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의 LA리포트]단전소동 부른 전력자율화

  • 입력 2001년 1월 31일 18시 37분


애플과 휴렛팩커드. 잘 알려져 있듯이 이들은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컴퓨터회사들입니다. 이들을 포함한 실리콘 밸리의 굴지의 회사들이 전기부족으로 인한 순번제 단전조치로 먼지가 뽀얗게 앉은 볼펜과 종이를 꺼내서 옛날식으로 업무를 봐야 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지난 대선에서 제3세계에서나 일어나는 것으로 믿어온 개표소동이 벌어져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깨주었다면 이번에는 세계 첨단산업의 메카이고 미국에서도 가장 부유한 캘리포니아주에서 개발도상국에서도 흔치 않은 단전조치가 취해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전기료 3배 껑충▼

물론 이같은 사태가 벌어진 데에는 엄격한 환경보호에 따른 발전소 신규 건립의 어려움, 예상 밖의 경제호황에 따른 전력수요 증가 등 여러 요인이 결부돼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에는 80년대 이후 미국을 지배해 오고 있는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에 따라 전력을 자율화해 시장에 맡긴 전력자율화 조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동안 미국은 많은 나라와 달리 공기업이 아니라 전력대기업이 전기를 생산, 판매해 왔지만 가격 생산 판매 등에서 주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오른 ‘에린 브로코비치’와 같은 환경소송이 제기되자 캘리포니아의 전력회사들은 골치 아픈 발전은 독립업체에 팔아버리고 자신들은 이들 업체에서 전기를 사서 판매만 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을 챙길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의 독점을 깨고 시장경쟁에 맡기면 더 싼 값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막대한 돈을 들여 로비를 벌여 1996년 전력자율화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피트 윌슨 당시 주지사는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낡은 독점을 끝장내고 경쟁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하면서 주민들은 당장 10% 정도 전기료를 절감하는 효과를 얻을 것이며 2002년까지 전기료를 동결해 사실상 20% 정도의 절감효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4년 뒤 자율화의 결과는 충격적인 순번제 단전조치였습니다. 그것도 전기료 동결 약속을 깨고 지난해 전력요금을 3배나 올리고도 말입니다. 사실 당초 약속과 달리 캘리포니아주는 현재 절대 다수의 주들이 전력자율화를 하지 않은 전국 평균에 비해 50%나 비싼 전기료를 내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한 데에는 전력시장이 자율화되자 전력회사들로부터 발전소를 사들여 독점하기 시작한 발전회사들이 전기가 현대생활에서 필수불가결한 재화이면서 저장이 되지 않고 단기간에 발전소를 지어 공급선을 대체할 수도 없는 특수한 재화라는 점을 이용해 시장을 조작했기 때문입니다. 전력수요가 폭등하는 시기에 발전소들을 점검, 보수한다는 이유로 일시폐쇄해 전력부족사태를 인위적으로 야기하고 부족한 전력에 대해 터무니없는 값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주는 부족한 전력을 지난해에 비해 100배나 비싼 값에 구입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자율화를 거부해 종전처럼 시정부가 전력을 운영하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안정된 전력공급으로 이번 소동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주정부는 “전력 자율화는 치명적이고 위험한 실패작이었다”고 선언하고 전면적인 정전사태를 막기 위해 전기료를 3배나 올리고도 급등한 전력 구입가격 때문에 사실상 파산한 전력회사들에 막대한 혈세를 긴급지원했습니다.

▼한전 민영화 재검토해야▼

여론조사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주민의 92%가 전력자율화를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답했고 시민단체들은 전력의 재공공화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또 주정부는 발전소 매각을 향후 5년간 금지하는 한편 전력회사들을 인수해 공기업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캘리포니아를 모범 사례로 칭송하며 전력자율화를 추진하던 네바다, 아칸소 등 많은 주들도 놀라서 이를 중지시키거나 재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의 경험을 보건대, 현재 김대중 정부가 공기업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전의 민영화는 재검토돼야 합니다. 물론 공기업은 개혁돼야 하지만 민영화만이 해결책은 아니며 특히 국회의원 선거 낙선자를 공기업에 낙하산식으로 내려보내 놓고 공기업 개혁을 외치는 것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입니다.

(서강대 교수·현 UCLA 교환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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