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의 LA리포트]클린턴만 빛낸 美TV토론

  • 입력 2000년 10월 4일 18시 54분


하버드대와 예일대가 미국에서 1, 2위를 달리는 최고의 명문대임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두 명문 출신들이 토론을 벌이면 누가 이길까요?

21세기의 첫 미국대통령, 따라서 사실상의 21세기의 첫 ‘세계대통령’을 뽑는 역사적인 미국 대통령 후보 TV 토론이 4일 열렸습니다. 토론에 참가한 민주당 후보인 앨 고어 부통령은 하버드대 출신, 공화당 후보인 조지 W 부시 텍사스주지사는 예일대 출신이라는 점에서, 전혀 과학적인 표본 추출은 아니지만, 이 토론은 미국의 양대 명문대의 대결이기도 했습니다.

▼ 딱딱한 고어 불안한 부시 ▼

그런데 이번 토론은 많은 역대 토론과 달리 한쪽이 도중에 죽을 써서 끌려가거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토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유머나 두고두고 회자되는 한줄짜리 명답변이 나온 것도 아닌, 한마디로 재미없는 토론이었습니다. 굳이 점수를 매긴다면 내용면에서는 고어후보의 승리, 결과면에서는 부시후보의 승리라고나 할까요?

대학시절부터 엄청난 독서와 글쓰기로 하버드대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올린 우등생인 데다 기자생활을 통해 다진 논리를 토대로 탁월한 토론가로 정평이 나있는 고어후보는 이번 토론에서도 세금정책 의료보험 복지 국방 교육 등 다양한 사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 부시후보를 압도했습니다. 특히 부시후보의 프로그램에 따르면 미국의 상위 1%의 부유층에게 주어질 세금감면이 모든 의료보험 교육 국방예산에 들어갈 돈보다 더 많다는 등, 구체적인 숫자를 들이대면서 부시후보를 소수 부유층의 후보로 몰아붙였습니다.

이에 대해 부시후보는 “워싱턴의 숫자놀음”이라는 식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는 토론이 끝나자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늠름하게 연단을 내려와 가족들을 포옹했던 고어후보와 달리 TV 화면으로도 눈에 쉽게 뜨일 정도로 볼에 공기를 넣었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부시후보의 표정이 잘 보여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토론은 같은 명문대를 나와도 두 사람의 지적 능력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사실 부시후보의 경우 부모가 동문일 경우 그 자녀를 우선적으로 뽑아주는 특이한 미국 명문대의 전통이 없었으면 예일대에 들어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정치평론가들의 평이고 대학시절에도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부시후보가 승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저의 관찰입니다. 즉 부시후보가 불안하기는 했지만 대형사고를 치지 않고 토론의 달인이라는 고어후보와 맞서 어눌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는 것 자체가 결과적으로 부시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용면에서 고어후보가 승리했지만, 고어후보가 기대만큼은 부시후보를 몰아붙이지 못한 반면 부시후보는 예상보다 선방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어후보의 현란한 논리전개에 대해 부시후보가 그렇다면 지난 7년간 무엇을 했느냐고 반박했습니다. 이때 그것은 이같은 프로그램을 공화당이 지배하는 의회가 방해해 집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고어후보가 되받아쳤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결국 부시후보의 경우 워낙 그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던 것이 이번 토론에 유리하게 작용한 반면 고어후보의 경우 기대치가 워낙 높아 손해를 본 셈입니다. 게다가 고어후보는 그의 약점인 딱딱하고 정감이 안간다는 이미지를 이번 토론에서 불식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 클린턴의 말솜씨 그리워할 것 ▼

그러나 정작 이번 토론의 승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섹스스캔들로 이미지를 구겼다고는 하지만 클린턴의 토론이나 연설을 보고 있으면 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국대통령 중 최고의 커뮤니케이션의 귀재라고 부르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해박한 지식, 이를 평이하게 풀어나가는 대화술, 적재적소의 유머와 제스처 등 그의 커뮤니케이션은 하나의 예술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말로 국민을 설득하고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몇 안되는 정치인 가운데 한명입니다. 결국 해박하지만 딱딱하고 정감이 가지 않는 고어후보와 언제 죽을 쑤지나 않을까 불안한 부시후보의 토론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다시 한번 클린턴이 얼마나 뛰어난 커뮤니케이션의 귀재였던가를 실감했을 것이고 두사람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6개월 후면 클린턴의 뛰어난 말솜씨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서강대 교수·현 UCLA 교환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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