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서울대 교수 30% 동참 처음… 대통령 지역구서도 “진상 규명”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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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 봇물 터진 시국선언에 담긴 민심

 “믿었던 정부에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가만히 있을 순 없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보다 더 정치에 무관심했던 동료들도 같이 이름을 올리길 원할 정도였으니까요.”

 인디밴드 기타리스트 이모 씨(35)는 8일 ‘음악인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서울 광화문광장 발표 자리에도 참석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소극적으로만 목소리를 냈다. 최순실 씨(60·구속)의 국정 농단이 불거지자 울화가 치밀어 자신이 운영하는 공연장 겸 맥줏집에 뮤직비디오 대신 ‘술 맛 떨어지는’ 방송 뉴스를 틀어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적극적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음악인들이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나서 서명을 했다. 이 씨는 “행사장에 가보니 유명 가수뿐 아니라 국악, 클래식을 전공하는 음악인들도 모두 모였더라”며 “12일 민중총궐기대회에는 아예 광화문에서 콘서트를 열기로 한 사람들도 있다”고 전했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5일 대통령의 첫 대국민 사과 후 본격적으로 시작돼 보름이 지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각종 사회단체와 중고등학교, 개인까지 포함하면 수백 건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2016년 현재 전국을 휩쓸고 있는 시국선언은 과거와 얼마나 다를까. 동아일보는 시국선언에 담긴 민심을 분석하기 위해 주요 대학과 시민단체 등이 내놓은 시국선언문 201개 중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수집 및 분석이 가능한 146개의 내용을 분석했다. 또 시국선언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구속도 각오해야 했던 80년대 시국선언

 시국선언의 사전적 의미는 ‘정치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교수와 같은 지식인이나 종교계 인사 등이 한데 모여 우려를 표명하는 것’이다. 과거 국내에서 이뤄진 시국선언은 주로 종교인이나 재야인사, 교수 등이 앞장서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릴레이식’ 시국선언이 본격화한 것은 1986년이다. 이전에도 시국선언은 있었다. 하지만 같은 사안을 놓고 여러 단체가 시국선언을 이어간 것은 이례적이었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가 대학 자율화를 후퇴시키는 정책을 내놓자 이에 반대한 고려대 서울대 전남대 인하대 등 29개 대학 교수 780여 명이 잇따라 시국선언에 나섰다. 이 같은 분위기는 1년 뒤인 1987년까지 이어지면서 6월 민주항쟁의 원동력이 됐다.

 민주화 이전의 시국선언은 고문과 구속, 때로는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 정도의 엄중한 행동이었다. 1986년에도 시국선언을 한 교수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자 ‘시국선언 교수에 대한 보복을 중지하라’는 제하의 기사(동아일보 1986년 8월 8일자)가 나오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의사 표현이 자유로워지면서 시국선언은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등장하곤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2009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2013년), 세월호 참사(2014년)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민주화 이후 개별 시국선언이 갖는 파괴력은 확연히 줄었다는 평가도 있다.

 2016년 가을의 분위기는 또 다르다. ‘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시국선언은 20대의 젊은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다. 최 씨의 딸 정유라 씨의 특혜 입학 논란에 휩싸인 이화여대를 비롯해 여러 대학에서 시국선언문을 앞다퉈 발표했다.

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서울대 교수들이 ‘대통령과 집권당은 헌정 파괴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뒤 행진하고 있다. 이날 일부 참석자는 박종철 씨 등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서울대 학생들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렸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서울대 교수들이 ‘대통령과 집권당은 헌정 파괴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뒤 행진하고 있다. 이날 일부 참석자는 박종철 씨 등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서울대 학생들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렸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후 시국선언이 봇물 터지듯 나오면서 여러 기록을 낳고 있다. 7일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개교 이래 최대인 728명(서울대 교수 전체의 약 3분의 1)이 서명에 참여했다. 음악인들의 시국선언에도 역대 최대인 2350여 명이 이름을 올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지지 기반인 대구 경북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박 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대구 달성군의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은 개교 이래 첫 시국선언에 나섰다. 선언문에는 ‘국민의 목소리에는 귀를 닫고, 일개 개인의 사견을 곧이곧대로 국정에 반영하는 무능한 지도자’ ‘철저하고 투명한 수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총학생회장 금준호 씨(21)는 “학교 안팎에서도 우려보다는 응원이 많았다”며 “상황이 심각해진다면 전국 대학들과 함께 움직임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이 부끄럽다” 해외 동포들도 동참

 해외에서 시국선언이 쏟아진 것도 이례적이다. 지난달 31일 재외동포언론인협회에 이어 버클리 캘리포니아대(1일)와 하버드대(4일) 소속 유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했다. 영국(6일)과 중국 상하이(7일)의 교민들도 시국선언에 나섰다. 교민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연루된 스캔들인 만큼 외국인들도 큰 관심을 갖고 있어 우리의 입장을 알리고자 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미국 워싱턴에서 유학 중인 김모 씨(33)는 “이웃 주민이 ‘대통령이 무당 친구를 통해 나라를 좌지우지한다던데 사실이냐’고 물어보더라”며 “해명을 하긴 했지만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시국선언을 한 유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상하이 시국선언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우수근 둥화(東華)대 교수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중국은 외국인들이 모이는 것에 상당히 민감한 나라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연행될 각오를 한 사람들끼리 모였다”고 말했다.

 2009년과 달리 ‘시국선언에 반대하는 시국선언’이 사실상 없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1980년대 이전의 시국선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도구’였지만 최근에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돼 선언 자체를 두고도 찬반 논란이 일어나곤 했다”며 “하지만 이번에 반대의 목소리가 없다는 건 대다수 국민 의견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선 실세’ 등장 전후에 집중

 계층별로 보면 초반에는 대학생들이, 후반에는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을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대학생들이 낸 시국선언 125건 중 71건(56.8%)이 초반부인 10월 26∼31일에 집중됐다. 반면 교수들의 선언문은 32개 중 절반 이상(17개·53.1%)이 11월 1∼4일에 몰렸다. 2일 발표한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한 원로 학자는 “아무래도 교수들이나 원로들은 철저한 수사를 ‘요구’할지, ‘촉구’할지 등 표현 하나하나에 민감하다”며 “심사숙고하다 보니 선언문 작성에도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분석 기간(10월 26일∼11월 11일) 중 가장 많은 시국선언이 나온 날은 11월 3일이었다. 이날 하루에만 대학생 단체 21곳, 대학교수 모임 8곳, 시민·노동단체 4곳 등에서 모두 37건의 시국선언이 동시에 나왔다. 시국선언 준비 기간을 고려하면 최 씨의 귀국(10월 30일)과 검찰 소환(10월 31일), 구속영장 청구(2일), 구속(3일) 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3일은 또 학생의 날이다. 이날 발표된 선언문 내용의 수위도 높았다. 22개 선언문에 담긴 단어를 분석한 결과 ‘하야’ ‘퇴진’ ‘사퇴’ 등의 표현을 쓴 것이 72.7%(16개)에 달했다.

‘정유라 특혜’에 중고교생도 분노

 대학생과 중고교생들은 정유라 씨에 대한 특혜 논란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분석 대상 선언문 중 정 씨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총 52회. 이 중 46회가 중고교생과 대학생의 선언문에서 나왔다.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대학생 김모 씨(24)는 “정 씨가 리포트에 쓴 ‘해도 해도 안 될 망할 ××들’이란 표현을 봤다면 대부분 평범한 학생들은 누구든 화가 치밀어 올라 뭐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대학생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났다. 선언문에 자주 등장한 단어 중 ‘민주주의’가 10위 안에 들어간 건 대학생(8위·176회)이 유일했다. 아예 ‘민주주의에 사망 진단을 내린다’로 시작되는 선언문(보건의약학생대표자협의체)도 있었다. 헌법을 언급하거나 헌법 조항을 직접 인용한 선언문도 70개 중 40개나 됐다. 반면 대학교수 모임과 시민단체의 선언문에서 ‘민주주의’ 언급 비중은 각각 15위, 18위로 낮았다.

 적지 않은 중고교생이 시국선언에 나선 것도 화제가 되고 있다. 과거에는 중고교생의 정치적 발언을 금기시했지만 이번에는 ‘눈감아주거나’ 나아가 ‘응원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북원여고(강원 원주시)에서는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 옆에 교사들이 ‘여러분이 제자라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화답 대자보’를 붙이는 일도 있었다. 원광고(전북 익산시)에서는 학교가 직접 ‘학생회에서 만든 선언문을 교내에 붙여도 된다’고 허락하기도 했다. 이 학교 송태규 교장은 “학생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보겠다는데 못 하게 할 순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물론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시국선언을 막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학교 측이 관련 내용이 담긴 기사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해 구설에 올랐다. 경기 고양시의 한 고등학교는 시국선언을 한 학생들에게 “교칙에 따라 징계를 받을 수 있다”고 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최 씨의 측근들이 문화체육계에 깊게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관련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큰 목소리를 냈다. 문화체육 관련 단체가 낸 시국선언 7건에 많이 등장한 단어에는 다른 곳과 달리 ‘차은택’(전 창조경제추진단장·18회), ‘김종’(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16회)이라는 이름이 올랐다. 문화계 ‘블랙리스트’(16회)와 ‘검열’(9회)도 많이 언급됐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무용평론가 장광열 씨는 “일부 사람들의 이해관계만으로 중요한 문화 정책이 강행된 데 대해 충격과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권기범 kaki@donga.com·홍정수 기자  
#최순실 게이트#시국선언#박근혜 대통령#정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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