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6년 카스트로-체 게바라 쿠바 도착

  • 입력 2008년 12월 2일 02시 53분


자정이 막 넘은 시간. 멕시코 툭스판 강어귀에 자그만 한 요트 한 척이 조용히 멈춰 섰다.

잠시 후 건장한 청년들이 한 명씩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재빠르게 요트에 올라탔다. 청년들은 모두 올리브 그린색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란마’라는 이름이 붙은 요트는 청년들 중 한 명이 며칠 전 5만 페소(약 1만5000달러)에 사들였다.

디젤엔진이 달린 길이 18m의 허름한 그란마는 승선 정원보다 7배가 많은 82명의 청년을 태우고 나서야 물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멕시코 만의 높은 파도와 과중한 무게로 침몰 위기에까지 몰렸던 그란마는 일주일 뒤 쿠바의 해안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초 계획했던 상륙 지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방전쟁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청년들은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당시 쿠바의 영웅 호세 마르티가 상륙했던 해안을 통해 쿠바로 들어가려 했지만 늪지에 좌초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동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청년들은 그란마를 버리고 무기를 머리에 인 채 수렁을 벗어났다.

8명이 수렁에 빠져 목숨을 잃었지만 청년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해방시키고자 했던 쿠바 민중은 총을 들고 수렁을 빠져나오는 그들을 오히려 정부에 신고했다. 수렁에서 벗어나자마자 쿠바 정부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청년들은 결국 62명이 더 희생되고 난 뒤에야 정부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56년 12월 2일. 쿠바 혁명의 아버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쿠바 땅을 밟는 데는 이렇게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나머지 청년들과 함께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속으로 들어가 혁명의 불씨를 이어 갔다.

그로부터 25개월 뒤 카스트로는 마침내 혁명군을 이끌고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향한 5년여에 걸친 투쟁의 막을 내린 카스트로는 2년 뒤 TV연설을 통해 “나는 막스 레닌주의자다”라고 선언해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이후 미국과 끊임없이 긴장과 갈등을 이어 간 카스트로는 쿠바인들의 혁명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그란마를 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40여 년 전 그란마는 혁명의 씨앗을 쿠바로 실어 왔지만 지금 쿠바인들에게 요트는 자신의 꿈을 찾아 조국을 탈출하는 도구가 됐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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