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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살아보니]벵자맹 주아노/"주5일제, 즐겨보세요"

입력 2004-01-30 18:08업데이트 2009-10-10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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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산(秋山)이 석양을 띠고 강심(江心)에 잠겼는데/일간죽(一竿竹) 둘러메고 소정(小艇)에 앉았으니/천공(天公)이 한가히 여겨 달을 조차 보내더라.’

조선 중기 유자신(柳自新)의 이 시조는 조선의 엘리트였던 양반 또는 선비들의 여가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에게 여가는 한가로운 생활을 영위하거나 학문 정진에 매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들은 시문과 독서, 도화와 서예를 즐겼을 뿐 아니라 예기(藝妓)와 어울려 술을 마시고, 벗들과 모임을 갖고, 명산대천을 돌며 자연을 완상했다. 그들에게는 여가와 노동간의 뚜렷한 구분도 없었다. 그들은 평생 군자라는 ‘도덕적 교양인’상에 접근하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즐거움과 덕성, 학문, 개인적 성취, 행복, 사회활동, 예술이란 개념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화와 더불어 한국사회도 시간을 합리화하기 시작했고, 모든 계층이 생산 활동에 매달리게 됐다. 느슨하고 탄력적이던 시간개념은 빽빽한 스케줄의 연속으로 바뀌었다. 한가로움은 게으름의 동의어가 됐다. 여가는 노동력을 재창조(re-create)하는 시간이 됐다. 잠자고 운동하고 술 마시는 것은 노동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피로를 씻어줘 새로 일터에 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의 의미가 도락과 또 다른 이유다.

한국인은 대부분 자신의 자유시간을 불편해한다. 주어진 시간을 기껏해야 잠과 TV시청, 혼자 음악 듣기로 보낸다. 마치 ‘시간거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다. 한국친구들과 휴가를 보내는 것이 매우 지루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올해 본격적으로 실시되는 주5일 근무제는 그런 한국사회에 느리지만 근본적인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선진국의 여가혁명이 여가산업의 발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가를 어떻게 보내느냐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 시간을 노동시간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 진정한 시간으로 만들어가는 인식의 전환과 연결된다. 여가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으로 귀결된다.

생산성의 가치가 여전히 지배적인 한국의 현실에서 더 많은 여가로 인해 사람들이 자아와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고독과 공허에 직면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놀이공원, PC방, 스키 리조트, 노래방 등은 이 새로운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 근면과 집단 여가를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는 새로운 혁명이 될 것이다. 한국의 새로운 세대가 직면할 이 문제는 전례 없는 심리적 사회적 혼란을 낳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더욱 새로운 가치와 생활양식을 계발할 수 있는 전인적 교육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그 대안의 실마리가 교육과 가치를 자신의 삶 속에 통합했던 한국적 선비문화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약력 ▼

1969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나 파리4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1994년 한국으로 건너와 에콜 프랑세즈 강사와 홍익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 서울 이태원동에 레스토랑 ‘르 생텍스’를 운영하며 ‘한국적 상징구조’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준비 중이다.

벵자맹 주아노 프랑스 음식점 '르 생텍스'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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