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盧정부 반면교사 10년]<7>‘이념투쟁 장’ 돼버린 문화계

  • 입력 2008년 1월 7일 02시 52분


코멘트
《“책이 아니라 내 자식의 장례식을 하는 것 같았다.”

김대중(DJ) 정권 말기인 2001년 11월 초. 소설가 이문열 씨의 문학사숙인 ‘부악문원’ 앞에 시민단체 회원들이 모였다. 이들은 이 씨의 소설 733권을 관 속에 넣고 운구하듯 옮겨 조시(弔詩)와 조책문(弔冊文)을 읽으며 ‘책 장례식’을 열었다. 이 씨가 당시 김대중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비판한 칼럼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를 실은 데 대한 비난이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떠올리게 했다. 2005년 미국으로 떠난 이 씨는 최근 “지난 10년간 문화가 어떤 정권에서보다도 심하게 통제받았다. 감옥에 보내는 것만이 통제가 아니다. 하나의 방향만 강요하고 지원을 주지 않는 것도 통제의 수단”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10년간, 문화계는 정치계와 못지않은 이념 대립의 진원지였다. 순수예술을 추구하는 예술인은 밀려났고 진보 성향의 소수 문화운동가들이 빠르게 문화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10년간 문화계는 전선(戰線)이었다. 집권층이 문화를 정치이념과 사회의식 개조의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위원회 조직을 통해 문화권력 장악

1999년 5월 영화진흥공사를 대체해 영화진흥위원회가 출범했다. 영화인들이 위원이 되어 직접 의사 결정을 내린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출범하자마자 영화계 ‘세력 대결의 장’이 됐고 차츰 기존 영화계 원로들이 배제되고 문성근 씨 등 이른바 친(親)DJ 세력이 장악해 갔다.

영화진흥위원회 초창기 부위원장을 지낸 조희문 인하대 교수는 “표면에 내세운 위원회론은 돈줄을 장악해 문화예술 판도를 장악하려는 의도였다”며 “노무현 정부가 문화예술위원회를 추진한 것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성공 모델을 적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민예총 출신의 김명곤 국립극장장 등 일부를 제외하고 진보 성향의 인사가 대부분 외곽 문화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하에서는 민예총과 문화연대 출신 인사들이 문화계의 권력과 금력(金力)을 쥔 요직을 차지해 갔다.

○노무현 정부, 문화권력 싹쓸이

“새 정부에서는 한국예총같은 기득권 세력이 발을 못 붙이게 하고 민예총 등 진보세력이 대거 전진 배치되어 개혁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노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2003년 1월. 민예총이 주최한 ‘새 정부 문화정책’ 세미나에서 강내희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의 이 발언은 이른바 ‘문화계 새판 짜기’의 전주곡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노문모)’은 대부분 민예총과 문화연대 출신이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이창동 감독이 문화관광부 장관에, 문예진흥원장(현 문화예술위)에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인 현기영 씨가 임명됐다. 이어 국립현대미술관장, 국립국악원장에도 민예총 출신인 김윤수, 김철호 씨가 각각 임명되자 문화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전국대학 국악과 교수 포럼’은 국립국악원장 임용 철회와 장관 사퇴를 요구했다. 연극계 인사들도 ‘연극인 100인 성명’을 내고 “문화부는 민예총 편파 인사를 중지하라”고 항의했다.

이후로도 문화관광부 산하기관 등에는 대부분 ‘코드 인사’로 채워졌다. 인사 청탁이나 낙하산 인사를 둘러싼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오지철 전 문화부 차관이 인사 청탁에 연루돼 사퇴했고 유진룡 전 문화부 차관도 청와대 측의 인사 개입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다가 돌연 경질됐다.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원의 누나인 신선희 씨의 국립극장장 임명, 문희상 의원의 여동생인 문재숙 교수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도 논란을 낳았다.

○예술인 위에 군림하는 문화권력

현 정권의 문화계 ‘새판 짜기’의 정점은 2005년 8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출범이었다.

33년간 운영됐던 문예진흥원을 마감하고 민간 자율로 전환한다는 취지였지만 11명의 위원중 예총 소속 인사가 두 명뿐일 정도로 편중 현상을 보였다. 예술위는 2005, 2006년 정부산하기관 경영평가에서 연거푸 최하위를 기록했다.

정진수 성균관대 교수는 “예술인이 주인이 되는 예술행정이라는 미명 아래 예술인이 예술인 위에 군림하는 ‘문화권력’ 체제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에는 김병익 초대 위원장이 임기를 1년 남긴 상태에서 사퇴했다. ‘원월드뮤직페스티벌’ 추진 과정의 문제를 둘러싸고 민예총 출신 위원들이 집요하게 위원장 책임론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 위원장이 사퇴한 뒤 민예총 이사와 문화연대 대표를 지낸 김정헌 위원이 새 위원장에 선출됐다. 정권 말기 김병익 위원장을 도중하차시키고 새 위원장을 뽑은 데 대해 문화계에서는 “정권이 바뀌어도 문화권력을 ‘대못질’하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연출가 윤호진 씨는 “10년 동안 수천억 원의 지원금을 쏟아 부었으나 나눠 먹기식이어서 예술이 나아졌다는 징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며 “편 가르기에서 벗어나 공동관심사 프로젝트에 대한 집중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민예총 사람 심은 데 돈 난다?

규모는 예총의 10분의 1… 정부지원금은 동급

문화예술위원회는 한 해 1100억 원을 지원하는 문화예술계의 가장 큰 ‘돈줄’이다. 이 돈은 정부 예산 지원, 로또 수익금, 문화예술진흥기금(5000억 원 규모), 문화예술위가 소유한 뉴서울골프장의 수익금 등으로 조성된다.

1962년 출범한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예총)는 한국 예술계를 대표하던 단체. 하지만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에 대한 지원금이 대폭 늘어났고, 예총의 영향력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전국 700여 개 지회와 회원 120만 명을 거느린 예총 본부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인 1997년 문예진흥원(문화예술위 전신)으로부터 연간 5억8000만 원을 지원받았다. 반면 민예총 본부는 5000만 원을 지원받았다. 1988년 창립된 민예총은 전국 50여 개 지회와 회원 10만 명에 불과한 소수단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예총에 대한 지원은 동결된 채 민예총에 대한 지원액은 크게 늘기 시작했다. 1997, 98년까지 5000만 원에 불과하던 민예총 지원액은 1999년 2억5000만 원, 2001년 3억 원, 2002년 3억5000만 원으로 늘어났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04년에는 민예총 본부에 대한 지원액이 예총과 똑같은 5억8000만 원으로 65%나 늘었다. 외견상 같은 액수를 민예총과 예총에 나눠 준 것처럼 보이지만 민예총이 예총에 비해 회원 수와 규모 면에서 10분의 1도 안 되는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으로 늘어난 셈이다.

현 정부에서는 민예총 본부뿐 아니라 민예총 산하단체에 대한 지원액도 크게 늘어 예총을 추월했다. 2004년에 예총 산하 단체에 총 22억여 원이 지원됐고, 민예총 산하 단체에는 15억여 원이 지원됐다. 그러나 2006년에 이르러서는 민예총 소속단체가 22억여 원, 예총 소속단체는 19억여 원을 지원받아 역전 현상이 빚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문화예술위 위원들이 자신과 관련된 단체를 우호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박찬숙 의원이 2006년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예술위 위원들이 자신이 대표로 있거나 관련 있는 단체에 지원한 기금은 59억9420만 원에 이르렀다. 88명의 소위원 중에도 25명은 본인이 대표로 있거나 관련 있는 단체에 11억여 원의 기금 지원을 결정했다.

박 의원은 “총 70억여 원이 지원 대상자 심사업무를 담당하는 심사위원들에게 돌아간 셈”이라며 “예술위의 편파적인 구성이 예술단체에 대한 편중 지원을 낳았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