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여행)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흔적들을 찾아서

  • 입력 2014년 12월 15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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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사람을 늙게 하고, 건물을 낡게 만들고, 있던 존재를 없애고, 없던 존재를 있게 만든다. 서울은 그러한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변한 도시 중 한 곳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낸 것들이 있다. 자리지킴은 공간 속에서 이뤄졌다. 그 공간을 찾아갔고, 오래된 공간이 거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변화를 거듭한 강남과는 달리 서울의 강북에는 변하지 않은 것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EDITOR 곽은영 PHOTOGRAPHER 권오경


추억과 차 한 잔, 작은 헌책방 ‘대오서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은 서촌에 위치한 대오서점이다. 1951년 문을 연 이래 63년째 서촌 어귀를 지키고 있는 대오서점은 주인인 조대식 할아버지와 권오남 할머니의 이름 가운데 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스무 살 새색시 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헌책방을 꾸려오던 권오남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자식들이 이제 그만 쉬시라고 간판을 떼어놔도 다음 날이면 자식들 몰래 다시 간판을 걸며 세월은 흘러갔다.

한 자리에서 60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다 보니 대오서점의 여기저기는 매우 낡아 있다. 하늘색 나무 대문과 칠이 벗겨진 간판은 낡은 기와지붕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 조화로움은 되레 새로움이 되어 사람들의 걸음을 붙잡는다.

드라마와 뮤직비디오, 가수들의 앨범 사진에도 자주 등장하며 유명세를 치르던 대오서점은 얼마 전에는 서울시가 선정한 미래유산으로도 지정됐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대오서점에 들른 날 권오남 할머니는 여행 중이고 딸과 손자가 책방을 지키고 있었다.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다 대오서점을 운영하기 위해 귀국했다는 손자 장재훈 씨는 그곳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대오서점의 이곳저곳을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원래 할머니의 거처로 사용되던 방들은 작년에 보일러가 터진 것을 계기로 개조돼, 현재는 아예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카페가 들어서고부터 서점을 구경하려면 꼭 카페를 거쳐 가야 하는 구조가 되었다.

진열된 책들은 더는 판매하지 않지만,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오래된 책들을 뒤적이며 추억에 잠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대오서점의 공식 달고나. 카페의 메뉴는 아메리카노와 유자레몬차 두 가지. 음료를 주문하면 달고나 사탕을 함께 준다. 대오서점 달고나는 1,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가치에 가치를 더하는 곳 ‘통문관’

고서점으로는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인 인사동 통문관. 오래될수록 가치를 더하는 것 중 고서(古書)만한 것이 있을까. 문화재급의 서적을 발굴, 유통하고 있는 통문관은 일제강점기부터 같은 자리에서 고서를 판매하고 있다.

1934년 3월, 현재 통문관의 주인인 이종운 씨의 할아버지이자 통문관의 창업자인 이겸로 씨는 당시 지금의 통문관의 종업원으로 있다가 일본인이 내놓은 서점을 인수해 ‘금한당(金港堂)’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다 1945년 해방 직후, 이름을 통문관(通文館)으로 다시 바꿨다.

인사동 길 초입부에 위치하고 있는 통문관의 문을 열면 오래된 책 냄새가 묵직하게 난다. 냄새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국문학, 고고학, 사학, 미술사학, 불교사학 등 인문학 관련 고서들이 쌓여 있는 통문관을 방문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50대 이상의 남자들이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학구적으로는 박사과정 이상의 사람들이, 비율로는 고서 수집가와 공부하는 사람이 반반의 비율로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3대째 통문관을 지키고 있는 이종운 씨가 통문관을 물려받은 나이가 29살이었다. 당시 이종운 씨는 프로그래밍과 건축 캐드(CAD) 관련 일을 하던 IT업계 종사자였다. 그런 그가 갑작스러운 아버지 임종 후에 고서점 통문관을 운영하게 되었을 때, 인사동 일대에는 통문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그가 통문관을 맡아 운영해온 지도 17년이 지났다.

이종운 씨가 본업을 버리고 통문관으로 들어온 것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단순한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켜켜이 시간의 겹을 견딘 고서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수많은 책들 사이에는 몇백 년 세월을 지나온 사람들의 손때와 추억이 배어있다.


문인들의 사랑방 ‘학림다방’

대학로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이 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학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학림다방. 이곳은 1960년대 천상병, 전혜린, 김승옥, 이청준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청춘을 보낸 아지트이다.

동숭동에 서울대학교 법대, 예술대, 문리대가 있던 시절, 문리대 축제 명칭인 ‘학림제’에서 유래한 ‘학림다방’은 196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인들이 학림다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글을 쓰고 토론을 했다. 이 클래식한 다방을 그들은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제25강의실’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시국을 걱정하던 젊은이들은 학림다방과 함께 나이 들어갔다. 예전처럼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 시절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을 찾는다. <별에서 온 그대>, <상속자들> 등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젊은 사람들과 외국 손님들의 발길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학림다방의 좁은 입구에는 황동일 시인이 학림다방에 바치는 헌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 헌사를 읽고 1층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나무계단이 나오고, 이곳을 올라 낡은 나무문을 밀면 학림다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낡은 소파, 낡은 테이블, 낡은 피아노. 그리고 핸드드립 커피향과 클래식 연주가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곳에서 58년간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다.

복층으로 된 2층은 흡사 다락방과 같다. 유리 파티션으로 네 자리가 분리되어 있는데, 그곳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다방 주인장이 커피 내리는 모습,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 나누는 손님들의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황동일 시인의 헌사를 빌려 표현하자면, 학림다방은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말하자면 하루가 다르게 욕망의 옷을 갈아입는 세속을 굽어보며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 할 어떤 것이 있노라고 묵묵히 속삭이는’ 것 같다.


추억을 품고 있는 문방구 ‘보성문구사’

혜화동 로터리에서 혜화초등학교 방면으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보이는 보성문구사는 46년 역사를 자랑한다. 올해로 76살이 된 주인 할아버지는 1968년 경신고등학교 앞에서 문구점을 시작했다. 그러다 옛 보성고(現 종로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를 거쳐 25년 전부터 혜화초등학교 앞에서 문구점을 이어가고 있다. 문구점 운영만 46년째인 셈이다.

보성문구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할아버지가 직접 썼다는 간판이다. 간판에는 서점이름과 함께 체육복, 유도복, 교련복이란 말이 손 글씨로 곱게 쓰여 있다. 간판만 봐도 세월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필름 카메라의 ‘코닥 필름’이라는 노란 스티커도 유리에 그대로 붙어 있다.

그 외에도 세월의 흔적은 곳곳에 묻어 있다. 초창기 문구점을 열었던 경신고와 보성고의 배지와 마크, 단추 등도 아직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학교의 배지와 휘장, 선반 구석에 위치한 유물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런데 현재 보성문구사는 급매로 나와 있다. 문구점 입구에는 급매라는 말과 할아버지의 핸드폰 번호가 쓰여 있다. 오랫동안 문구점을 해왔으니 이제 그만 정리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게가 팔리더라도 자신이 직접 쓴 간판만은 그대로 유지해줬으면 했다. 인수하는 사람의 뜻대로 가게가 변할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에는 그만큼 의미가 있으니 문구점은 그대로 유지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3대째 이어지고 있는 중국집 ‘안동장’

자장면은 1900년대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들어온 화교들이 부둣가에서 일하며 물을 탄 중국 전통 장에 불은 국수를 비벼 먹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자장면의 기본 소스가 되는 춘장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중국 전통 장에 캐러멜 등의 첨가물을 더한 것이지만, 자장면은 6.25 동란 시절, 화교들의 삶의 터전에서 나온 음식이다.

을지로 대로변에 인접하고 있는 안동장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이다. 화교들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 중국집이 몇 군데 생겼는데, 지역개발로 현재는 대부분 사라졌다. 1948년부터 서울에 터를 잡은 안동장이 현재 3대째 이어지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을지로구가 아직 크게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낡고 허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작년 리뉴얼 공사를 한 안동장의 2대 왕용성 사장은 “음식점이란 호화스럽지는 않더라도 깨끗함을 유지해야 하는 곳이고, 그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말한다. 음식점에서 그릇 하나를 100~150년씩 쓰는 것은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왕용성 씨는 창업자인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본격적으로 안동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가 지킨 기본을 지키고자 했고, 지금 2년째 트레이닝 중인 아들 왕홍덕 씨에게도 그것을 강조한다.

“안동장에는 60년간 안동장을 찾아준 고객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주인장은 “새로운 개발도 좋지만, 장인의 정신을 지키며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안동장은 그저 시간을 버텨온 것이다.


오래된 만남의 장소 ‘태극당’


1946년 명동에 문을 열어 1974년 장충동으로 옮겨온 태극당은 2014년인 지금도 70년대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건 탁 트인 공간과 오래된 인테리어가 주는 편안함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꾸밈없는 정직이 느껴진다. 70년대 직장인들과 학생들의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었던 태극당은 직영을 고집해 서울에서도 장충동, 돈암동, 불광동 세 곳에서만 만나볼 수 있다.

대중적 음식인 빵은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극당은 건물과 인테리어는 물론, 빵 성분, 포장까지 옛날 그대로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어항도 옛날 그대로의 것에 테이핑을 해서 보수해가며 사용하고 있다. 복고가 트렌드인 요즘에는 그조차 개성으로 다가와 어색하지가 않다.

태극당 ‘카운타’에서 손님의 계산을 돕던 권가명 상무는 “유행에 따르지 않아 촌스럽기도 하지만 편안함을 주는 것이 태극당의 초심”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의 본연의 모습은 평범하고 부담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태극당도 기본에 충실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태극당은 큰 부지에 세워진 건물 한 채를 모두 사용하고 있는데, 1층은 매장으로, 2층은 공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3~4층은 예전에는 시골에서 올라오는 제빵공들의 기숙사로 쓰였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내년 5월에는 기존 건물의 용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리모델링할 계획이다. 외관은 현재와 같은 색으로 새 단장을 하고, 간판도 현재의 디자인을 최대한 보존할 방침이다.

갈수록 상품의 수명이 짧아지고 있다. 그만큼 소비자의 개성과 유행도 쉽게 변한다. 그렇기에 옛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오래가는 방법이 된다. 일상에서 즐겨먹는 간식을 부담 없는 가격으로 파는 태극당은 앞으로도 소박한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1세대 아파트 ‘충정아파트’


충정로에는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가 있다. 1930년에 세워져 올해로 84세의 나이를 자랑하는 서대문의 충정아파트가 그 주인공이다. 주변에 있던 서대문구청과 세무서가 모두 다른 곳으로 이전할 동안에도 초록색의 충정아파트는 묵묵히 이곳을 지키고 있다.

충정아파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를 간단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충정아파트는 1937년 일본인에 의해 지어져 도요타 아파트로 불렸다.

완공 당시 지상 8층의 반도호텔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 건물로 꼽혔다고 한다. 해방 직전에는 용도가 호텔로 변경되기도 했는데, 광복 이후에는 무단 점유돼 6.25전쟁 중에는 군사시설로도 이용되었다. 서울 수복 후에는 UN군 전용호텔로 사용되고, 1961년에는 4층에서 5층으로 증축 공사가 이뤄졌다.

1979년에는 충정로 8차선 확장사업으로 아파트 전면부가 잘려나가는 대대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이 충정아파트라는 한 공간에서 벌어진 파란만장한 역사이다. 요즘은 건물이 미관상 좋지 못하다며 흉물이라고 불리며 철거 대상으로 분류되고 있는 실정이다.

충정아파트와 비슷한 시기인 1960~197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는 대부분 20~30년 쓰다 철거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른 곳보다 튼튼하게 지어진 것이 강점이다. 충정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그 점을 높이 평가한다.

1층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박종희 씨는 충정아파트가 옆집에서 꽹과리를 쳐도 들리지 않을 만큼 방음이 잘 돼 있다고 말한다. 10살 때 충정아파트로 이사와 34년째 이곳에서 살고 있는 306호의 안명자 씨도 교통이 편리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것을 충정아파트의 장점으로 꼽는다.

우리나라 최초로 중앙난방을 했을 정도로 첨단 시설을 갖추고 지어진 충정아파트의 내부에는 삼각형의 중앙정원이 있다. 그곳의 복도는 끊어지는 곳 없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아파트는 급박하고 숨 쉴 틈 없는 인간의 삶을 닮아있는 건축”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아파트가 정취와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이야기.

그러나 충정아파트를 보면,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정취는 있기 마련이고 인간의 삶을 닮은 공간에는 더 많은 의미가 새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사제공 = 엠미디어(M MEDIA) 라메드 편집부(www.remede.net) 취재 곽은영 기자(www.egihu.com), 촬영 권오경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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