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은 평등하게 오지 않는다[정신건강 대전환기, 우리 사회의 길을 묻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0일 10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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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2019년 봄, 영국 웨일즈 지역 어린이들의 여름방학을 살핀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됐다. 방학 기간에 다양한 외부 활동을 하고 더 많은 사회적 교류를 경험한 아이들은 개학 무렵이 되자 정신건강이 더 좋아졌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상태가 낮은 아이들은 ‘학교 밖 활동’이랄 것이 없었으며, 더 많은 외로움과 배고픔을 호소했다. 결국 학교 문이 닫힌 시기에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의 심리적 안녕감(mental-wellbeing)은 점차 나빠졌다.

이듬해인 2020년에는 2만여 명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국가건강조사를 진행한 호주 연구 결과가 다른 학술지에 발표됐다. 가족 수입이 중산층 이상이면 아동과 성인 모두 정신질환을 가질 가능성이 낮았다. 같은 해 11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낮은 사회경제적 상황이 기분 장애, 정신병적 장애, 자해, 약물 문제, 치매 등에 이르는 경로를 밝히기도 했다.

연봉이 7만5000달러에 이르면 그보다 수입이 늘어도 증가되는 행복감이 크지 않다고 주장했던 연구가 있다. 이를 통해 돈이 개인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낮추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연구 방법론의 약점을 보완해 미국 펜실베니아대에서 3만3000여 명을 대상으로 추적조사를 한 결과, 수입이 늘어날수록 안녕감이 높아지는 양상이 뚜렷했다. 행복의 평형 상태에 이르는 변곡점같은 것은 없었다. 수입이 늘면 늘수록 긍정적 정서는 증가했고 부정적 정서 경험은 현저히 낮아졌다. 개인의 정신건강은 평등하게 오지 않았다.

수입은 단지 돈이 많고 적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사회경제적 상태가 높을수록 심리적 위기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많아진다. 폭 넓은 교육과 다양한 경험, 사회 관계망 자체가 개인의 ‘자원’이 된다.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있어 마음이 힘들면 생업을 잠시 쉴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는 몇천 시간 동안 수련을 마친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촘촘하게 개업해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할 시간이 있으며, 석박사급 이상의 심리 전문가들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심리치료를 받을 수도 있다. 사회경제적 자원이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심리적 자원도 두터워지고 자신에 대한 통찰이 늘기에, 차츰 정신건강 위기를 직면하고 이를 다루는 법을 습득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는 다만 시간과의 싸움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디어나 술을 소비하는 것처럼 가능한 싸게 지불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서적 마비’를 꾀한다. 경험과 환경의 제약으로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가늠할 수 없거나 비전문적인 조언에 의존하다가 개입의 적기를 놓치는 경우는 매우 빈번하다.

한국에서 정신건강 문제만큼은 여전히 ‘각개전투’다. 마음의 문제를 예방하고 평가 및 예측하며 개입하고 재활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 체계가 여전히 부족하다. 일례로 미국과 유럽연합(EU)에서는 수십,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장기 추적하는 정신건강 실태 조사를 진행한 지 오래지만, 국내에선 같은 조사가 현저히 작은 규모로 그때 그때 일회성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일례로 한국이 지난 4년(2018~2021년) 동안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사업’으로 편성한 1099억 원은 덴마크가 아동 청소년의 자살 예방을 위해 1년 동안 지원하는 비용인 7억3400만 크로네(한화 약 1360억 원)에 미치치 못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기간 동안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공적 시스템의 중요성은 더욱 뚜렷해졌다. 노르웨이, 미국, 중국, 일본,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 진행된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대규모 감염병으로 개인이 고립되고 경제적 위기에 처해 우울, 불안, 불면, 약물 문제 등이 발생할 때 낮은 사회경제적 상태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음을 일관되게 보여줬다.

사회경제적인 상황이 낮은 사람들은 이 급작스러운 재난이 가져온 심리적 위기를 완충해 줄 자원이 부족했다. 이들은 안전한 환경, 안정적 지지 체계, 건강한 생활습관과 영양, 다양한 여가 활동, 그리고 교양 있는 보호자와 학교가 제공하는 질 좋은 교육이 주는 그 모든 이득에서 빗겨 서 있었다. 이는 사회적 취약군의 정신질환 유병률 및 자살률 증가의 원인이 됐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이미 코로나19 기간 동안 전 세계의 정신건강전문가들은 치열한 논의를 지속하였고, 효과적인 서비스에 대한 몇 가지 합의를 도출했다. 바로 대규모 정신건강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해 임상적 문제를 조기에 발견할 것,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한 개입을 선별해 제공할 것, 이때 디지털 기반 기술로 서비스의 접근성과 확장성, 신속성, 경제성을 높일 것.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쉽게 약해지는 고리를 최대한 빨리 살펴 개입할 것 등으로 요약된다.

코로나19 이후 장기 후유증을 뜻하는 ‘롱코비드(long-COVID)’는 비단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단어가 아닐 수 있다. 국민의 정신건강 문제는 우리의 예상보다 긴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상황으로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고립될 수 있고, 장애를 얻을 수 있음을 우리는 목격했다. 정신건강이 평등하게 오지 않는다면 국가와 사회가 그동안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는 돌아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가 국민의 정신건강 불평등 문제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국격에 어울리는 대국민 정신건강 서비스를 마련해야 할 때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부교수(카카오임팩트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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