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희낙락 정상酒 비틀비틀 사고酒

기온이 영상 29도를 훌쩍 넘은 9일 오후 경기 하남시 창우동 애니메이션고등학교 앞. 술에 취한 등산객이 검단산 입구에서 동료들의 부축을 받고 산에서 내려왔다. 동료들도 술을 마신 듯 막걸리 병을 한두 개씩 들고 있었다. 이들과 같이 내려오던 등산객들은 “술냄새 풍기는 등산객이 다리가 풀려 걷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산꼭대기에서 마시는 정상주(頂上酒)가 평지에서 마실 때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산속에서 음주를 즐기는 등산객은 의외로 많다.

알코올 질환 전문병원인 다사랑중앙병원의 전용준 원장은 “정상주는 탈수와 혈압상승 같은 직접적인 부작용과 함께 뇌신경 둔화에 따른 실족과 부상 등 2차 사고의 위험을 크게 높인다”고 경고했다.

○ 혈중 알코올 농도, 평지보다 최고 2배

정상주를 마시고 하산하는 등산객은 “땀을 빼고 난 뒤 술을 마셨는데, 평소보다 더 빨리 취하고 잘 깨지 않는다”고 말한다.

탈수 현상으로 인한 부작용이다. 등산을 하면 수분과 염분이 땀으로 배출된다. 이런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탈수 현상이 심해진다. 술이 이뇨 작용을 유발하면서 나타난 결과.

전 원장은 “평지에서 성인 남자가 소주 3잔을 마시고 1시간이 지나면 혈중 알코올 농도가 음주운전 단속 기준치인 0.05% 정도 나온다. 똑같은 양을 산 정상에서 마시면 탈수 현상 때문에 최고 0.1%까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혈중 알코올 농도 0.1%는 운전면허가 취소되는 기준. 산을 오르면서 마시는 술이 평지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얘기다.

술은 소뇌(小腦)의 운동기능과 평형감각, 인체의 반사 신경을 둔화시킨다.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증세가 등산 중에 심해질 수 있다. 정상주를 마신 후 하산하다가 운동신경 마비로 발을 헛딛는 등 위험한 사고가 일어날 확률도 높아진다.

숙취도 심해진다. 전 원장은 “음주 이후 수분이 보충되지 않으면 햇빛의 영향으로 두통과 피로, 현기증을 동반하는 일사병 증상이 나타난다. 심하면 의식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산에서 술을 마시면 열기가 올라 따뜻하다고 느낀다. 이는 일시적인 착각이다. 시간이 지나면 저체온증이 찾아온다. 알코올이 혈관을 확장시켜 열을 발산하면서 체온을 떨어뜨린다. 위험한 등산로에서 저체온증에 걸리면 조난의 위험이 커진다.

○ 고혈압 환자는 더욱 주의해야

서울시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2007∼2011년에 서울시내 산에서 사고를 당한 인원은 4958명이다. 한 달에 83명이 사고를 당해 구조를 받은 셈이다.

유형별로 보면 실족 및 추락이 1963명으로 39.5%를 차지했다. 또 근육파열(염좌)이나 타박상으로 조난을 당한 사람이 740명(14.9%)이었다. 사고의 절반은 오후 2∼6시, 즉 하산 시간대에 일어났다.

산에서 술을 마시다 당하는 사고는 소방본부의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서울시소방재난본부 이영팔 구조대책팀장은 “실족 사고나 중상 등의 사고에서 음주 여부를 조사할 겨를이 없기 때문에 통계가 없을 뿐”이라며 “사고 수습 과정에서 술에 취한 등산객을 흔히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의료 전문가들은 특히 고혈압 환자의 산행에 주의를 당부한다. 이들은 처음부터 높은 산에 오르지 말고, 낮은 산을 다니다 점차 고도를 높이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음주로 인해 혈압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등산객은 특히 높은 산을 오를 때 아예 술을 마시지 않아야 안전하다.

전 원장은 “술을 마셨든, 마시지 않았든 간에 급격한 혈압 상승으로 가슴에 통증이 오거나 숨이 평소보다 더 가빠 오면 휴식을 취한 후 바로 하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정상주 대신 하산주를 마시면 조난 사고가 크게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 전문가들은 “하산주도 한두 잔으로 끝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산에서 내려오면 등산으로 인해 체력이 많이 소모된 상태가 된다. 식욕이 증가하고 체력이 강해졌다는 심리가 더해져 과음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체력이 소모된 상태에서 과음을 하면 숙취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길어진다.

전 원장은 “등산을 끝내고 불가피하게 술을 마실 때는 한두 잔 정도면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다. 그 이상은 건강을 해칠 수 있다”며 “물을 충분히 마셔 소변으로 알코올을 배출하고 될 수 있으면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