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를 상징하는 물건으로는 흰 가운, 청진기 그리고 진찰실 책상 위의 혈압계를 들 수 있다. 위급 상황에서 혈압계는 사람이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료장비다. 이 때문에 응급실에 환자가 오면 가장 먼저 심장 박동과 혈압 수치를 파악한다.
혈압계 중에서도 환자의 팔뚝에 밴드를 감고 고무펌프를 손으로 꾹꾹 눌러가면서 재는 수은혈압계를 의사들은 소중히 여긴다. 수은혈압계는 1901년에 발명돼 100년 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의사의 오랜 친구인 수은혈압계가 진료실에서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가정용 디지털혈압계 때문이다.
환자의 혈압은 계속 변한다. 편안할 때 혈압을 기준으로 전화통화만 해도 10정도 상승하며 회의를 하면 20이 상승한다. 또 의사가 병원에서 혈압을 재는 시점이 어느 상황인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를 기준으로 치료방침을 결정한다. 몇 달에 한 번 의사가 재는 혈압, 하루에도 수십 번 오르락내리락 변하는 혈압 수치의 하나를 근거로 치료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 합리적이지 못하다.
의사는 여전히 디지털혈압계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도 환자가 집에서 디지털혈압계로 측정한 혈압을 얘기하면 믿지 못할 기기라며 화내는 의사도 있다. 하지만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미국심장협회는 2004년 발표한 ‘혈압 측정의 권유사항’이라는 자료에서 “의사가 병원에서 측정하는 혈압은 상당수 정확도가 떨어지며, 가정혈압이나 24시간 활동혈압이 매우 중요하다”고 발표했다. 의사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내용이다.
미국심장협회와 미국고혈압학회는 2008년 “가정혈압은 정확하고 신뢰성 있고 표적장기손상을 더 잘 반영하여 예후 판정에 도움이 된다”고 선언했다. 병원에서 측정하는 혈압(사무실혈압)이 집에서 디지털혈압계로 수시로 측정하는 가정혈압보다 정확하고 환자의 상태를 더 잘 나타낼 것이라는 그간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든 것이다.
노태호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디지털혈압계와 가정혈압은 100년 역사의 수은혈압계와 사무실혈압계를 진찰실에서 밀어내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의사의 진료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의사는 가정에서 측정하는 평소 혈압을 더욱 주의 깊게 살피고, 진료에 좀 더 세밀하게 반영해야 한다.
환자는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혈압계의 종류가 천차만별이므로 신뢰성 있는 디지털혈압계를 사용해야 한다. 또 병원에서 알려준 정확한 방법으로 가정혈압을 측정해서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리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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