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수묵/´인터넷 가면´의 종착역

  • 입력 2002년 12월 11일 18시 14분


2002년 대통령선거의 새 ‘풍속도’를 꼽으라면 단연 인터넷이다.

1997년 대선 때만 해도 인터넷은 없다시피 했다. 인터넷 인프라(기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탓이다. 현 정부가 5년간 심혈을 기울여 ‘세계 최고수준’의 초고속인터넷망을 갖춘 뒤 상황은 바뀌었다. 인터넷은 어느 순간 ‘돈 안 드는 선거’ ‘21세기적 시민정치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인터넷의 ‘숨은 얼굴’이 드러나면서 이 기대는 무참히 무너지고 있다. 지금 ‘사이버 세상’으로 불리는 인터넷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욕설과 비방 그리고 흑색선전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름 끼치는 살기(殺氣)가 넘실댄다.

지역감정보다 위험한 세대 계층간 분열과 적대감 그리고 잔악한 인간적 모독이 자행되고 있다. 음모정치의 상징인 거짓 여론조사 결과가 유포되고 과거 군중집회의 폭력보다 끔찍한 ‘말의 테러’가 인터넷을 도배질하고 있다.

글쓴이가 ‘공개’를 전제로 한, 그러나 ‘가면’을 쓴 인터넷 게시판의 글들을 옮겨보자.

“서울 신촌 PC방에는 ▽▽당의 알바생(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엄청나다. 순진한 대학생 꼬시지 마라.” “야 이×아. 사실이 아님 죽인다.” “욕하지 마라 ××야. 능력 있으면 찾아와 봐라.”(○사이트 게시판)

“이 미친×아 니가 잘 할 거라 생각해? △△△씨 봐 얼마나 얼굴도 듬직하고, 믿을 만한가.” “너 ○○○의 알바지? 냄새가 풀풀난다 개××야.”(D포털 게시판)

이런 욕설은 수도 없이 많다. 인터넷을 드나들면 아예 ‘면역’이 생길 정도다. 이른바 ‘손님’을 끄는 매터도(흑색선전)성 글들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대한민국은 10%의 상류층이 나라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라. 못 배운 것들이 쯧쯧….”

빈부격차나 학력 열등감을 교활하게 자극하는 내용이다. 예상한대로 성난 네티즌들의 반박 글이 순식간에 잇따랐다.

“너는 투표하지 마라. 그럼 90%의 국민은 씹는 껌이냐.” “너 같은 ×은 돈 써서 군대 안 갔겠지.” “네가 ◇◇◇를 지지하는 것은 기득권 유지 때문이지?”(D포털 게시판)

매터도였다면 200% 이상의 효과를 본 셈이다.

한 대학교수의 TV발언 중 ‘부분’만을 트집잡는 비방 글에선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를 찾아볼 수 없다.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인간들이 말하는 싸가지들 하고는….” “더러운 지식인×들.”(O사이트 게시판)

인터넷 이용자의 대부분은 청소년과 젊은이들이다. 선거 판세를 좌우한다는 20, 30대가 주류다. 그 인터넷의 그늘진 저편에서 계층 분열과 세대간 적대감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선거가 끝나도 치유하기 힘든 망국병이다.

‘말의 폭력’에 거부감이 있다 해도 모든 유권자들은 투표하기 전, 인터넷에 접속해 볼 필요가 있다. 부녀와 모자가 손잡고 지금 인터넷에서 무슨 일이, 무엇을 향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불법 탈법 선거운동의 주범은 누구이며, ‘가면’을 쓴 이들은 누구인지도 판가름해야 한다. 한국을 정보기술(IT) 강대국, 나아가 세계 일류 국가로 이끌 인터넷의 ‘종착역’이 고작 밀교(密敎)적 구태 정치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수묵 사회1부 차장 moo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