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통일대박의 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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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 내주 訪獨… 統獨 격변의 현장을 가다

통일 독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은 지금…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의 상징이다.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으며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허가받은 사람만이 이 문을 통해 양쪽을 오갈 수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 통일의 서막을 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영구 개방됐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1964년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베를린 장벽에 헌화하는 모습.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청와대 제공
통일 독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은 지금…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의 상징이다.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으며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허가받은 사람만이 이 문을 통해 양쪽을 오갈 수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 통일의 서막을 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영구 개방됐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1964년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베를린 장벽에 헌화하는 모습.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청와대 제공
《 독일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2014년 한국과 독일을 이어주는 양대 화두(話頭)는 ‘통일’과 ‘경제’다.

1990년 10월 통일을 이룬 독일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은 한국에 부러움의 대상이다. 통일 이후 옛 동독과 서독의 통합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와 이를 통해 찾아낸 해법은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에 훌륭한 참고서가 될 수 있다. 탄탄한 제조업 경쟁력으로 무장해 유럽 경제위기의 해결사로 나선 독일의 저력은 창조경제를 통해 새로운 경제 활력의 모멘텀을 찾으려는 한국 경제에 모범답안과도 같은 모델을 제시한다.

전후의 폐허를 딛고 ‘라인 강의 기적’을 일군 독일이 한때 유럽의 병자(病者)로 추락했다가 21세기 들어 유럽 경제권의 명실상부한 ‘원 톱’으로 떠오른 것은 기술력과 내수시장, 노동 생산성의 3박자가 적절히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실이라는 평가가 많다. 한때 독일 국민들에게 ‘재앙’으로까지 여겨졌던 통일은 거짓말처럼 독일의 부활을 이끈 축복이 됐다. 준비된 통일이라야 혼란을 줄일 수 있다는 교훈은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5∼28일 독일을 방문한다.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50년 전 찾았던 바로 그곳이다.

아버지가 독일의 상징인 ‘아우토반’을 보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경제부흥의 의지를 다졌다면 박 대통령은 ‘통일 대박’을 실현할 전략과 비전을 가다듬을 것이다.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넘어 통일 대한민국의 모습을 구체화한 ‘박근혜 통일 독트린’ 선언 가능성도 점쳐진다. 과거사에 대한 진솔한 사과로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인들의 신뢰를 회복한 독일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반성하지 않는 이웃’ 일본에는 무언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박 대통령의 독일 방문에 앞서 드레스덴을 찾았다. 옛 동독 지역에 위치한 드레스덴은 1989년 12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5주 만에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가 동독 주민들 앞에서 통일을 주제로 연설한 곳이다. 독일 화폐 통합과 통독의 기폭제가 된 명연설로 꼽힌다. 박 대통령도 독일 통일의 상징도시인 이곳에서 통일의 꿈을 밝히는 연설을 한다. 》  

▼ 옛 동독지역인 드레스덴 2000년이후 年평균 14% 성장 ▼


독일 동남부 작센 주 주도인 드레스덴은 독일 통일을 상징하는 도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철저히 폐허가 됐지만 통독 이후 ‘하이테크 수도’로 거듭났다. 드레스덴의 명물인 프라우엔 교회는 통독의 기폭제가 된 헬무트 콜 당시 서독총리의 1989년 연설 장소이기도 하다.
독일 동남부 작센 주 주도인 드레스덴은 독일 통일을 상징하는 도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철저히 폐허가 됐지만 통독 이후 ‘하이테크 수도’로 거듭났다. 드레스덴의 명물인 프라우엔 교회는 통독의 기폭제가 된 헬무트 콜 당시 서독총리의 1989년 연설 장소이기도 하다.
독일 동남부 엘베 강가에 있는 드레스덴은 ‘유럽 북부의 베네치아’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중세풍의 도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연합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됐던 드레스덴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더욱 주목받았다. 드레스덴은 전쟁의 폐허와 통일 후유증을 이겨내고 2000년 이후 12년간 평균 14%의 경제성장을 기록하며 유럽 최고의 ‘하이테크 수도’로 다시 태어났다. 독일 통일 10주년 행사도 드레스덴에서 열렸다.
[1] 통일 후 동독 경제부흥의 상징 드레스덴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 방문 중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연설할 드레스덴 공대는 재학생 3만7000명, 교직원 및 연구인력 8000명 규모의 독일 최대 기술대학이다.

19일 드레스덴 공대에서 만난 학생들은 박 대통령의 방문 소식을 알고 있었다. 이 학교 학생 콘라트 블루멘슈타인 씨(26)는 “첨단기술과 글로벌 기업들을 보유한 한국 대통령의 연설을 꼭 현장에서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스 뮐러 슈타인하겐 드레스덴 공대 총장은 “박 대통령의 방문으로 한국의 첨단기업과 대학, 연구소와의 적극적인 협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박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 발언에 동의하느냐고 묻자 “독일도 만약 통일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유럽과 세계에 경제강국으로서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드레스덴 세계무역센터 내 집무실에서 만난 디르크 힐베르트 경제부시장은 부인이 한국 사람이라며 한글로 된 명함도 건넸다. 그는 “한국 대통령이 드레스덴을 찾는 이유는 같은 분단의 아픔을 겪은 역사, 통일 후 경제발전 전략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힐베르트 부시장은 드레스덴 시가 해외 고급 연구인력을 유치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창조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의 창의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드레스덴에 오는 한국 유학생은 음대생이 대부분이었는데, 박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한국의 하이테크놀로지 연구인력을 많이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했다.


[2] ‘통독의 가장 결정적 순간’ 드레스덴 연설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는 비망록에서 자신의 드레스덴 방문 연설을 “독일 통일과정에서 나의 가장 결정적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1989년 12월 19일 콜 총리가 동독의 마지막 총리였던 한스 모드로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드레스덴 벨뷔 호텔 앞에 도착했다. 당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동독 주민 수만 명이 “독일, 독일!” “헬무트, 헬무트!” “우리는 한 민족!” 등 통일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콜 총리를 열렬히 환영했다. 이들은 예정에도 없던 콜 총리의 즉석연설을 요청했다. 콜 총리는 회고록에서 “그 순간 내가 사람들에게 뭔가 말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했다”고 회상했다. 역사적인 순간은 이렇게 왔다.

프라우엔키르헤 교회의 폐허 돌무더기 앞에서 연설에 나선 콜 총리는 “역사적 순간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저의 목표는 한결같이 우리 민족의 통일”이라고 했다. 독일 통일에 대한 의지를 동독 땅에서 처음으로 선포한 것이다.

데틀레프 퀸 전독문제연구소장은 “콜은 드레스덴 방문 불과 4주 전에 서독 국회의사당에서 ‘통일은 정말 오래 걸릴 것이며 언제 될지 모른다’는 내용으로 연설했다”며 “드레스덴에서 확인한 동독인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통일정책을 이끌어 가는 기폭제가 됐다”고 말했다.
[3] 독일은 첫 정상회담 20년 만에 통일…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통일 관련 연설을 할 드레스덴 공대의 외관. 왼쪽 작은 사진은 한스 뮐러 슈타인하겐 드레스덴 공대 총장.
드레스덴=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박근혜 대통령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통일 관련 연설을 할 드레스덴 공대의 외관. 왼쪽 작은 사진은 한스 뮐러 슈타인하겐 드레스덴 공대 총장. 드레스덴=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1970년 3월 19일 동독 에르푸르트에서 동·서독 첫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로부터 1990년 통일이 이뤄지기까지 정확히 2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첫 남북 정상회담은 2000년 6월에 열렸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다. 독일과 같을 수는 없지만 2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치면 6년 정도가 남은 셈이다.

독일 통일이 가능했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동독 주민들의 간절한 통일 열망이었다.

1988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의 개혁·개방 바람이 불었지만 동독은 이에 역행했다. 북한이 중국식 변화를 거부하고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로 스스로 고립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동독 주민의 동독 탈출이 이어졌고 시위도 거세졌다. 1989년 9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자 20일 만에 동독 주민 2만4000명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다. 희망을 잃은 20∼40대 청장년층이 주로 떠났다. 서독은 그들의 안정적인 서독 정착을 위해 지원책을 마련했다.

그러던 중 1989년 10월 자유를 외치는 시민 봉기인 동독 혁명이 일어났다. 동독 정부는 시위를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시위가 열린 라이프치히에 무장세력 8000여 명을 배치했지만 시위대는 군대를 압도했다. 당시 동독인의 84%가 독일 통일에 찬성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 주민이 통일을 바라는 것이 중요하다”며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탈북자 정착 여건 개선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들어 자유를 산다는 뜻의 ‘프라이카우프(Freikauf)’ 방식의 국군포로 송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서독은 1963∼1989년 3만3755명을 송환한 동독에 그 대가로 34억6400만 마르크에 해당하는 현물을 건넸다. 대략 1인당 10만 마르크 정도로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5300만 원에 해당한다.
[4] 주변국들의 축복 필요한 통일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뒤 독일을 분할 점령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국 중 시종일관 독일 통일을 찬성한 것은 미국이 유일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다음 날인 1989년 11월 10일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서독의 콜 총리에게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독일 통일의 첫 신호”라는 축하 전문을 보냈다. 다만, 통일된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은 있었다.

반면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통일에 부정적이었다. 제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대한 잔상, 통일 이후 독일의 부상에 대한 두려움 등이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걸림돌은 소련이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동독의 개혁을 주장했지만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는 않았다.  

▼ 1989년 西獨총리 연설때 東獨주민들 “우린 한민족” 환호 ▼
1989년 12월 19일 당시 동독 지역인 드레스덴을 찾은 헬무트 콜 서독 총리(연단 앞에 선 사람)가 프라우엔키르헤 교회의 폐허 돌무더기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설을 듣고 있는 동독 주민들의 열렬한 반응이 인상적이다. 동아일보DB
1989년 12월 19일 당시 동독 지역인 드레스덴을 찾은 헬무트 콜 서독 총리(연단 앞에 선 사람)가 프라우엔키르헤 교회의 폐허 돌무더기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설을 듣고 있는 동독 주민들의 열렬한 반응이 인상적이다. 동아일보DB
하지만 미국이 직접 나서면서 통독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은 1990년 초 영국, 프랑스 정상과 잇달아 회담을 열고 독일 통일이 영국과 프랑스에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고 설득했다. 제임스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은 소련을 방문해 “통일된 독일이 NATO에 가입하는 것을 동의해 달라. 그 대신 동독 지역에는 절대 NATO군을 주둔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동·서독을 포함한 ‘2+4 회담’이 1990년 5월 처음 개최됐다. 4차례의 회의 끝에 그해 9월 독일의 통일을 승인하는 조약이 체결됐다.

박 대통령도 지난해부터 중국,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통일이 중국과 러시아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적극적으로 설명해 한반도 통일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이끌어냈다. 주변국 외교가 통일의 중요한 변수라는 점을 염두에 둔 행보다.
[5] 통일 후유증으로 ‘유럽의 병자’ 추락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던 독일 경제의 성공신화는 1990년 통독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무너졌다. 1970년대 연평균 4%대의 높은 성장을 이어갔던 독일 경제는 2001∼2004년 연평균 성장률이 0.65%로 떨어졌다. 2003년엔 마이너스 성장률(―0.3%)로 곤두박질치면서 그 여파로 2004년 실업률이 12%까지 치솟았다. 실업자 수는 세계 대공황을 겪은 1932년(618만 명) 이후 최대인 520만 명까지 늘었다.

통일에 따른 후유증, 사회적 시장경제의 부작용, 과도한 노동 규제, 독과점에 따른 가격경쟁력 상실 등 경제 분야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중병을 앓던 독일 경제는 노동 개혁으로 재기의 시동을 걸었다. 독일 정부는 과도한 복지와 경직된 노동시장의 폐해를 뜯어고치기 위한 프로그램 ‘어젠다 2010’과 ‘하르츠 개혁안’을 2003년에 내놓았다. 근로자 해고 요건을 완화하고 비정규직과 임시직을 늘리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최대 3년이었던 실업수당 지급기간을 1년으로 줄이고 노동청 고위직을 민간 전문가로 채웠다.
[6] 독일 부활을 견인한 통독의 위력

2000년대 중반 이후 독일 경제는 서서히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과감한 개혁과 함께 통일을 계기로 내수 기반이 확대된 영향이 컸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성장률은 3.9%로 반등했고 이후에도 선진국으로서는 견고한 1% 안팎을 유지했다. 500만 명을 넘던 실업자는 300만 명대로 줄었다.

노동비용 부담을 덜게 된 기업들은 오히려 적극적인 고용 보장에 나섰다. 근로자와 기업이 협력하는 이른바 ‘라인 자본주의’ 모델이 되살아난 것이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서 독일의 노동 생산성은 세계 1위였다. 인접국인 프랑스(16위) 영국(30위) 스페인(38위) 등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한국이 지상과제로 꼽고 있는 고용률 70%도 독일은 2008년에 이미 달성했다. 조호정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고용개혁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꾸준히 늘어나고, 이것이 경기 회복과 맞물린 게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개혁을 시작했을 때 일각에서 제기된 “질 낮은 비정규직만 늘어날 것”이라는 비판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새로 생긴 일자리 가운데 전문가와 기술 직종이 차지하는 비율이 69%에 달했다. 100만 개 이상 늘어난 시간제 일자리는 주로 고령층과 여성에게 돌아갔다. 집에 머물던 비경제 활동인구를 시간제 일자리로 끌어내면서 전문직 등 양질의 일자리까지 함께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가 구축됐다.
[7] 유럽을 좌지우지하는 독일의 힘

“이게 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탓입니다. 시장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줘도 모자랄 판에….”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 수습에 한창이던 2011년 10월 18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트레이더가 케이블TV 경제채널에 출연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독일 총리를 비판했다. 메르켈 총리는 일주일 뒤 열릴 유럽연합(EU)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번 대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는 꿈일 뿐”이라고 비관적 견해를 밝혔다. 그의 말 한마디에 이날 미국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가 250포인트 넘게 급락하는 등 주요국 증시가 요동쳤다.

유럽 경제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세계 금융시장은 메르켈 총리의 표정과 발언 변화에 주목한다. 유럽 강대국 가운데 유일하게 금고가 넉넉한 독일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경제위기가 더 번질 수도, 초기에 진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유럽권의 경제 문제에서는 미국 대통령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독일 총리만큼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으면 지난 커버스토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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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경제위기는 역설적으로 독일 경제가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통일 이후 ‘유럽의 병자(病者)’에서 ‘유럽의 엔진’으로 거듭난 독일의 성공 스토리는 선진국 문턱에서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이 가야 할 길을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드레스덴·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동정민·이상훈 기자
#독일#통일#박근혜#방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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