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20>나만의 제스처로 살아가는 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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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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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 흉내 내느라, 나의 길 잃어버리지는 않았나요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다. 그런데 무언가 집안 공기가 좋지 않다. 이상한 분위기를 만드는 주범은 큰아들이다. 젓가락으로 밥을 깨작깨작하는 것이 영 불안하기만 하다. 아니나 다를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낸다. “저, 공부는 무엇 때문에 하는지 모르겠어요.” 당혹스러운 말이다. “너, 공부하기 싫은 거니. 혹시 성적이 떨어진 것은 아니니.” 순간 얼마 전에 본 큰아들의 성적표가 생각났다. 과거와 다름없이 우수한 편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들은 공부를 회의하게 된 것일까? 한편으로 불안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견하기도 했다.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자신은 아들처럼 공부에 대해 깊게 회의했던 적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자신도 공부를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원하던 대학에 무난히 입학했고, 또 대학에서도 공부를 나름대로 해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신이 원하던 회사에 입사할 수도 있었다.

큰아들의 속앓이를 말끔하게 풀어주기는커녕 갑자기 수많은 생각이 둑이 무너져 흘러넘치는 물처럼 몰려든다. “지금 나는 왜 회사에 다니는 걸까”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등등. 아버지와 아들의 고뇌,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지금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두 사람은 고뇌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두 사람이 쓸데없는 지적 사치를 부리고 있다고 투정할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사람은 두 사람의 고뇌에서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무거운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라. 사실 두 사람은 자신의 삶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남의 삶을 맹목적으로 흉내 내는 삶을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 충분한 이유와 목적이 있는 삶, 즉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야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삶에 대한 이런 인문학적 속앓이는 불필요한 법이니까. 타인의 제스처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제스처로 삶을 살아내려는 결단!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결단이다.

불행히도 대부분 사람들은 타인의 제스처를 흉내 내느라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 ‘장자(莊子)’의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어느 젊은이와 같다고 할까.

“그대는 연(燕)나라의 도시 수릉(壽陵)에서 자란 젊은이가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으로 가서 걷는 방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는가? 한단의 세련된 걷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그는 과거 수릉에서 배웠던 걷는 방법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기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나라의 어느 젊은이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문화 중심지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유행하던 걸음걸이를 배우려고 했나 보다. 아마 중국 변방에서 자란 지적이고 문화적인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조나라의 세련된 걸음걸이를 배우지도 못하고, 과거 자신이 배웠던 걸음걸이도 잊어버리게 된다. 결국 그는 멋지게 걷기는커녕 초라하게 기어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단의 걸음걸이’, 즉 ‘한단지보’로 유명한 이야기의 내용이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깊이 반성할 일이다. 하루하루 우리는 타인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 자신의 걸음마저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타인의 걸음걸이를 따라 하다 보면, 우리는 연나라의 젊은이처럼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자신의 걸음걸이, 혹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주인공이 아니라 단지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왜 아버지와 아들이 인문학적 속앓이를 했는지. 그래서 우리에게 김수영(金洙暎·1921∼1968) 시인이 있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다른 어떤 위대한 사상가도 그만큼 명료하게 인문정신의 핵심을 통찰했던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너도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김수영전집 중 ‘달나라의 장난’에서

김수영 시인의 초기 작품에 속하는, 1953년에 쓰인 ‘달나라의 장난’이란 시다. 이 시는 시인 스스로 출간한 최초의 시집의 제목으로 쓰일 정도로 중요한 작품이다. 어느 날 시인은 돌아가는 팽이를 보게 된다. 그러고는 섬세한 시인답게 그는 팽이에게서 자신의 삶, 혹은 우리 인간의 삶을 직감한다. 아무리 기세등등하게 돌고 있다고 하더라도 팽이는 언젠가는 멈추게 된다. 어차피 멈출 것을 왜 돌고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한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슬프다. “팽이가 돈다/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그렇지만 시인은 알고 있다. 팽이는 오직 돌 때에만 팽이일 수 있다는 사실을. 팽이는 돌기를 멈추고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돌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스스로 채찍질해야만 한다고 각오를 다진다. 시인을 포함한 우리 각자는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탁월함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팽이의 운동을 통해 인간의 공존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직감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팽이는 다른 팽이가 도는 데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팽이 놀이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돌고 있는 팽이가 다른 팽이와 부딪히면 둘 중 하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멈추게 된다. 팽이는 다른 팽이의 운동을 따라 하다가는 스스로 멈추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타인의 운동을 흉내 내는 순간 돌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너도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고 김수영은 말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 채찍질해야만 하는 우리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와 하나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가 되려는 순간 돌아가는 두 개의 팽이처럼 어느 하나는 혹은 둘 다 돌기를 멈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선은 그저 동일한 삶의 지평에서 서로의 회전을 존중하면서 공존☆하는 것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억압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회전 스타일을 모든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고, 결국 강요하는 사람이나 강요받는 사람 모두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우리에게 역설한다. 타인의 삶을 흉내 내지 말라고. 이것은 정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그것을 포현하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하긴 다른 팽이의 회전이 멋있다고 해서 그것을 흉내 내는 순간 자신만의 스타일로 돌고 있는 팽이는 더 이상 제대로 돌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어떤 팽이가 자신만의 회전 스타일을 모든 팽이에게 강요하는 사태 아닌가? 그래서 김수영 시인은 국민에게 동일한 스타일로 돌아야만 한다고 강요하던 독재정치에 반대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 가치가 다른 모든 인간적 가치를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가 정치적 독재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경제적 독재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아들의 학업도, 그리고 아버지의 직장생활도 모두 경제적 가치로 평가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는 고민했던 것이다. “왜 나는 공부를 잘해야 하는가” “왜 나는 직장에 다녀야 하는가” 이런 인문학적 고뇌는 아들과 아버지가 스스로 도는 팽이가 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인문학☆☆의 열풍은 우리 이웃들이 스스로 돌기 위한 팽이가 되기 위한 채찍질이라고 할 수 있다. ‘폭포’라는 시에서 김수영은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희망을 피력했던 적이 있다. 어쩌면 시인이 그토록 원했던 곧은 소리가 화답하고 있는 때가 요즘인지도 모를 일이다.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공존(共存·coexistence)☆
인간은 동일한 장에서 함께 존재해야만 한다는 가치다. 김수영은 공존을 같은 테이블 위에 돌고 있는 두 개의 팽이로 설명한다. 고독하게 혼자 돌 수밖에 없는 팽이는 외롭기 때문에 다른 팽이와 함께하려고 한다. 서로 필요하고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두 팽이는 너무 근접해서는 안 된다. 서로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두 팽이 중 하나는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로 자식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강요하는 부모는 자식이란 팽이를 못 돌게 만들 수 있고, 배우자를 지나치게 사랑하여 상대방의 삶의 스타일을 맹목적으로 수용한 사람이 공존에 실패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동일한 장에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삶의 스타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공존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人文學·Humanities)☆☆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은 바로 암흑시대에 빛을 가져오는 서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글자 그대로 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데, 다시 태어난 주체는 바로 ‘인간’ 자신이었다. 마침내 신과 그것의 본성을 다루는 신학 대신, 인간다움(Humanity)과 그것을 숙고하는 인문학(the humanities)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이 중세시대 기독교의 세계관을 뚫고 새롭게 부활한 셈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서양 근대사회의 인문학은 인간을 넘어서는 일체의 초월적 가치에 대해 일정 정도 회의적인 자세와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그 초월적 가치가 종교든, 정치권력이든, 아니면 자연의 힘이든지 간에 관계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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