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22>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2월 2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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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관영(瓘영)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나자, 한 끈에 엮인 듯 그 북쪽으로 이어 진채를 펼치고 있던 조참(曺參)의 부대도 함께 무너졌다.

그날 새벽잠에 깊이 빠져 있던 조참은 관영이 쫓기면서 급하게 보낸 전갈과 뒤따라 다가오는 초나라 군사의 함성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당한 중에도 급하게 갑옷투구를 걸치고 장수들을 불러 모았으나 이미 초군에 맞서 싸울 형편은 아니었다. 조참은 겨우 모인 장졸들에게 관영에게서 받은 전갈을 들려준 뒤 미련 없이 진채를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뒷날 조참 스스로 돌이켜 보아도 야릇한 공포와 무력감의 전이(轉移)였다.

“서쪽으로 달아나는 적은 뒤쫓지 말라! 동쪽으로 팽성을 되찾는 일이 아직 남았다.”

패왕 항우가 다시 그런 명을 내려 관영과 조참의 군사들을 놓아주고 소성 밖에 있는 다른 제후들의 진채로 군사를 몰아갔다. 한왕의 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매섭고 불같은 두 장수가 그렇게 무너지니 다른 제후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대개는 누구에게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무참하게 짓밟혀 흩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갈가마귀떼 같은 군사라 해도 5만이 넘는 대군이 지키던 소성 밖 벌판이었다. 패왕의 3만 군이 무인지경 가듯 휩쓸어도 성 밖 한군을 모조리 쓸어내는 데는 한 시진(時辰) 가깝게 걸렸다. 초나라 군사들이 마지막으로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의 군사들을 두드려 쫓고 있을 때는 벌써 해가 동녘 벌판 위로 벌겋게 솟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소성 동문이 열리며 한 떼의 인마가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겨우 싸울 채비를 갖춘 위왕(魏王) 표(豹)가 성안의 장졸을 이끌고 제 편을 돕는답시고 달려 나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뜻은 가상해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때마침 허둥대며 달아나는 하남왕 신양을 한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린 패왕이 불이 뚝뚝 듣는 듯한 눈길로 위왕 표를 보며 소리쳤다.

“이놈 위표(魏豹)야. 과인은 너를 어여삐 여겨 서위왕(西魏王)으로 세우고 대접도 박하지 않았거늘, 너는 어찌하여 과인을 저버리고 늙은 도적에게 항복하였느냐?”

위왕이 그 소리에 찔끔해 말고삐를 당기며 패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한때 위나라의 성 20여 개를 제힘으로 되찾고, 함곡관을 넘어 들어가 싸운 공으로 왕위까지 얻은 사람이었다. 패왕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의연히 맞받았다.

“대왕이야말로 어찌하여 의제를 시해하시어 천하의 공분(公憤)을 사시었소? 나는 대의를 받들어 천자를 시해한 역적을 벌하고자 일어난 한왕을 따랐을 뿐이오,”

그러자 패왕이 벌컥 화를 내며 큰 징이 깨지는 듯한 소리로 꾸짖었다.

“저놈이 그래도 붙어 있는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어서 그 목을 바치지 못할까!”

그리고 아직도 신양의 피가 마르지 않은 창을 쳐들고 몸소 위왕 표를 덮쳐갔다. 그 뒤를 승세를 탄 초나라 장졸들이 한 덩이가 되어 따랐다.

오추마가 워낙 빨라 얼결에 패왕과 맞닥뜨리게 된 위왕은 겨우 몸을 비틀어 한 창을 피했으나 애초부터 그 적수가 못되었다. 말이 엇갈리자마자 박차를 가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성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를 뒤따라 나온 1만여 명 장졸들도 마찬가지였다. 초나라 군사들의 엄청난 기세에 눌려 창칼조차 제대로 맞대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달아났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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