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83…귀향 (17)

  • 입력 2003년 12월 4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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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당신 병이 낫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을 때, 동아여관과 동아관은 남편과 아들에게, 삼나무 집은 딸에게 상속하겠노라고 경리를 담당하는 무라카미 변호사에게 다짐했는데, 전쟁이 끝나 일본 사람들이 부랴부랴 본국으로 돌아가자 무라카미 변호사도 장부와 유언장을 양아버지에게 건네고 사라졌다.

양아버지는 엄마의 유언을 무시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하고 약속하고, 그럴 때마다 그럼그럼이라며 고개를 끄덕여놓고서, 화장해서 재를 밀양강에 뿌린다는 약속을 어기고 엄마를 교동 제사 고개 비탈에 묻었다. 금 구슬이 달려 있는 비녀만 며느리에게 주고 노리개하고 옷은 모두 내게 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마저 어기고 내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쫓겨나 엄마가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본처가 낳은 오라버니 집에 몸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집에는 전처와 후처와 정부가 낳은 아이가 여섯이나 있어, 나는 만날 툇마루에 앉아 있든지 부엌에 서 있는 꼴이었다. 오라버니의 후처는 드러나게 나를 싫어하면서, 삼랑진에 사는 스물여덟 살 난 남자를 신랑감으로 들이밀었다. 그는 부산 철도의 기관사였다. 배운 것도 없고 말도 없는 사람이라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지만, 여자하고 술하고 도박하고는 인연이 없어 보였고, 어디든 여기보다 낫겠지 싶어서 지난달에 납폐를 주고받았다. 1월 1일, 혼수 이불을 만들어주는 엄마도 사위에게 술잔을 건네는 아버지도 없이 나는 혼자서 가마를 타고 타인의 집에서 타인의 집으로 향해야 했다….

소진은 마비된 오른 다리를 들어올리고 오른손을 뒤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지금 강가 길에는 아무도 없다. 만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김원봉 장군의 연설이 벌써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해방된 지 여섯 달, 온 밀양이 김원봉 장군 얘기로 떠들썩했다. 민족 독립의 큰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난 열여덟 살 소년이 마흔여덟 살 나이에 장군으로 돌아왔으니, 안 그렇겠나. 조선 역사에 항우처럼 이름을 남길 끼다.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평양에 가서 김일성하고 회담을 하고 왔다 카더라. 현상금을 그래 많이 걸었는데도 왜놈들한테 안 잡힌 게, 다 파리로 변신하는 재주 덕분이라더라, 경찰에서는 파리라 부른다 안 카더나.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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