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79…귀향(13)

  • 입력 2003년 11월 30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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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위에서 주검처럼 꼼짝않고 있는데 엄마가 들어와 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빗어내리면서, 코맹맹이 달큰한 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파란 치마 긴 치마 허리에 두르고

깊은 시름에 잠겨 있는데

비가 오는구려

아리덩더쿵 스리덩더쿵

어쩔 수 있나

파란 치마 비에 젖어도

어쩔 수 없지

나는 실눈을 뜨고 엄마의 얼굴을 슬쩍 보고는 금방 눈을 감아버렸다. 엄마의 눈길은 꿈을 꾸듯 늘 먼 곳을 헤매고 있는데, 때로 그 눈빛이 어둡고 무거워서 겁이 났다. 엄마는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중얼…용하… 용하… 용하…내가 한 살 때 단독으로 죽었다는 아버지 이름. 아버지는 아버지라도 본처와 본처 자식이 따로 있고, 내게는 소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을 뿐 한 번 안아준 적도 없다….

재혼해서 남동생을 낳은 후 자궁을 앓은 엄마는 비싼 보약을 먹고 유명하다는 의사를 몇 명이나 찾아다니고 대구 김 무당에게 부탁하여 우환굿까지 했지만, 아이고 가슴이야, 장이 뱀처럼 뒤틀리는구나, 아이고 나 죽는다! 아이고! 라고 이부자리에서 기어나와 울부짖었다. 결국은 외할아버지가 의사와 의논하여 아편을 피게 했다.

새싹이 벚꽃처럼 하얗게 보이는 계절이었다. 시커먼 구름이 종남산 저 너머에서 몰려와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뜨뜻미지근한 바람과 굵은 빗방울이 나무가지에서 새싹을 쥐어뜯어 여기저기 흩뿌렸다. 쟁반에 물병을 담아 안방에 들어가보니, 엄마는 빨갛게 연지를 칠한 입술을 꼭 다물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잠시 내 얼굴을 보고, 입술을 몇 번 움찔거리고는 빗소리에 지워질 듯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다는 본 적이 없지만도…바다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재…너거 아버지는 떠돌이 관상쟁이였다, 밀양으로 흘러들기 전에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팔도강산 안 가 본 데가 없다 캤재…나는 그 사람이 바다 얘기를 하면 그저 좋아서, 틈만 나면 졸랐다, 그 사람 팔을 베개 삼아 베고…그래서,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어도…안다…암…암…바다라 카면 다 안다…고름 풀어서 저고리를 벗고, 파란 치마하고 속적삼도 벗어서 모래 위에 내려놓고….”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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