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보니]노영찬/한국선 반미가 지성인가

  • 입력 2002년 1월 8일 18시 08분


9·11사태 직후 이곳 워싱턴DC에 객원교수로 오신 한국분이 한국에 가서 부산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어떤 초등학교 학생이 ‘빈 라덴’ 노래를 부르더라는 것이었다.한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30년 전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치를 때 흔히 볼 수 있었던 미국 대학가의 대규모 반전 운동이나 시위를 이번 사건 이후에는 왜 전혀 볼 수 없느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미국의 전성기 ‘팍스 아메리카나’는 20세기와 함께 사라지고 21세기는 한국이 ‘팍스 퍼시피카(Pax Pacifica)’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말도 한다.

지금 미국 대학가의 무드는 30년 전과 전혀 다르다. 얼마 전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있는 캘리포니아주립대 졸업식에 초청된 한 연사가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 정부가 테러를 막기 위해 마련하고 있는 각종 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 도중 학생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연설을 끝내지 못한 일이 있었다. 미국은 1970년대의 가치관에 대한 반성과 수정을 가한 지 오래다. 더구나 9·11 사건을 경험한 미국은 국가와 공동체의 보호 없이는 지금 누리고 있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욱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소위 말하는 ‘레이건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70년대 미국의 가치관에 변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미국 사회에서는 베트남전 개입에 대한 반성이 깊게 내면화하는 한편 70년대의 극단적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미국의 ‘새로운 보수’는 진보세력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고, 진보세력은 보수적인 요소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구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을 가져온 것은 미국의 군사력이 아니고 온건주의와 ‘새로운 보수주의’였다. 요즘 미국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는 민주당의 이슈를 훔쳐오고 민주당 후보는 공화당의 이슈를 훔쳐오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형편이 됐다. 물론 9·11사태가 미국의 보수세력을 더 강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국의 ‘새로운 보수’는 미국을 배타주의가 아닌 다원주의로 더 나아가게 하고 있다. 9·11 이후 미국의 소수민족과 소수종교들이 그 전보다 훨씬 더 미국에 대한 애착심과 애국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 지성은 미국의 70년대 사고방식에서 아직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선 이번 사건의 본질은 미국의 외교정책의 문제만도 아니고 보수와 진보의 문제만도 아니다. 문제의 복합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또는 평면적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둘째, 한국의 지성 가운데는 ‘허구적 우월감’을 반미주의로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지난 30년간 한국은 괄목할 만한 경제적 정치적 발전과 함께 성장한 민족주의가 반미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때로는 맹목적 민족주의로 바뀔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셋째, 참다운 비판정신의 결여다. 한국사회에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드러내는 비방은 많아도 자신까지 포함해 문제를 지적하는 건전한 비판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근 파키스탄의 핵 물리학자 페르베즈 훗보이, 이란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자 샐먼 루시디, 이집트 출신의 여류기자 모나 엘터호이 등 이슬람 최고의 지성들은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들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을 비난함으로써 이슬람 전통이 과거 500년 동안 지녀온 고질적인 문제를 정당화시키는 상투적인 사고를 버려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이슬람의 초창기에서 13세기까지 누려왔던 문명의 황금시기를 잃어버린 것은 기독교가 거쳤던 종교개혁과 정교 분리의 역사가 없었고, 서구문화가 겪었던 인문주의와 문예부흥이 없었던 데다 합리와 이성이 종교적 근본주의에 의해 묻혀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지성의 생명은 비방이 아니고 비판이다. 비방은 자기를 포함시키지 않는 무책임과 편리가 있지만, 비판은 항상 자기 살을 도려내는 아픔까지도 포함한다.

노영찬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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