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가 된 이세돌, 굴욕적 자세 참고 알파고의 요구대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3일 22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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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은 바짝 엎드린 ‘맹수’ 같았다. 굴욕적인 자세였지만 기꺼이 자청했다. 그는 이래야만 사냥에 성공할 수 있다고 봤다. 알파고를 상대로 인간으로서 공식 대국 첫 승을 올린 이 9단의 승인을 분석했다.

●끝없는 인내

그는 사냥감을 노리기 위해 초반부터 알파고가 해달라는 대로 움직였다.

바둑 격언에 두 점 머리를 맞지 말라고 했지만 두 점 머리를 맞았다. 상대가 이단 젖혀도 반발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인내, 또 인내의 연속이었다.

3국까지 알파고와 대결한 그는 인간 프로기사의 시각이 아닌 알파고의 눈으로 바둑을 보기 시작했다. 그 역시 그동안 알파고의 능력을 흡수하며 알파고를 이길 수 있는 해법에 한걸음 다가서려고 노력했다.

초반 뜻밖의 수를 뒀던 알파고처럼 이 9단도 해설하던 프로기사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수를 여러 차례 뒀다.

평소 같으면 ‘기세 부족’이라고 얘기할 만한 수였지만 다른 프로기사들도 “‘알 사범(알파고의 별명)이 두는 수와 비슷한 개념의 수”라며 “지금 당장 이해할 순 없어도 이 9단이 분명 작전을 갖고 나온 것 같다”고 해석했다.

●벼랑 끝 전술

낮은 포복으로 일관하던 이 9단은 드디어 중앙에서 폭발했다. 불리한 싸움이 분명한 데도 그는 개의치 않고 백 62로 나가 전투를 걸어갔다. 프로기사들이 잘 안된다고 예상한 수였다.

그러나 이 9단은 이를 통해 일단 좌변에 실리를 마련한 뒤 상변에서 중앙으로 흘러나온 백 말의 생사에 승부를 걸었다. 해설장의 분위기는 어두워졌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백(이 9단)이 좋은 결과를 내기 힘든 모양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단명국이 되지 않겠느냐는 전망까지 나왔다.

모두가 비관하던 그 순간에 이 9단은 20여분 이상 장고하며 찬찬히 수를 읽었다. 그리고는 맹수가 갑자기 솟구쳐 오르며 적의 급소를 물 듯 백 78로 끼웠다. 아무도 예상 못한 수였다. 공개 해설장이 부산해졌다. 이 수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다. 그러나 백 82까지 되자 갇힌 백 대마가 탈출하는 수가 생겼다.

●알파고의 버그?

그러자 1~3국 동안 거의 완벽한 모습을 보였던 알파고에게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마추어 상급자도 하지 않을 실수를 연발한 것이다. 흑 87, 89, 93, 97이 이해할 수 없는 실수였다. 중앙에서 수가 났다 해도 차분히 대응하면 팽팽한 형세였으나 이런 어이없는 실수로 인해 불리해진 것. 알파고의 버그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후 끝내기가 이어지면서 알파고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 9단을 추격해왔다. 마지막 초읽기에 몰린 이 9단은 초읽기가 거의 끝날 무렵 수를 두는 등 관전하는 사람들의 심장을 졸였다. 막상 계가를 한 송태곤 9단은 백 150의 시점에서 “이 9단이 앞서있긴 하지만 만만치 않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9단은 한발 씩 전진했고 점점 승리의 문으로 나아갔다. 한 수 착수할 때마다 승률을 계산하는 알파고는 계속 예상승률이 나빠지자 또 실수를 연발하기 시작했다. 흑 159, 167, 171 등 이해할 수 없는 수를 남발하다가 백 180을 보고 돌을 던졌다.

인류의 첫승이 확정되자 공개 해설장에는 축하 박수가 쏟아졌다. 김만수 9단은 “이 9단도 점점 알파고를 상대하면서 진화하고 있다”며 “극한의 상황에 몸을 던지는 ’벼랑 끝 전술‘이 알파고에게 통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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