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오일쇼크? 아니, 더 무서운 첫번째 ‘나프타 쇼크’가 왔다[딥다이브]

  • 동아일보

쓰레기 종량제 봉투 사태로 전 국민이 나프타(naphtha)가 뭔지 알게 됐죠. 이란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으면서 ‘나프타 쇼크’가 배달용기부터 페인트까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데요. 이를 보며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플라스틱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요.

연료용 기름이 없으면 휘발유차 대신 전기차를 타는 방법이 있죠. 하지만 생활 속 플라스틱을 대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불과 70~80년 전만 해도 우리가 플라스틱 없이 살았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점이죠. 이란전쟁으로 흔들리는 플라스틱 세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나프타 쇼크로 쓰레기 종량제 봉투 대란이라고? 진짜 난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뉴시스
나프타 쇼크로 쓰레기 종량제 봉투 대란이라고? 진짜 난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뉴시스


*이 기사는 4월 3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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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키운 플라스틱 산업
가볍고 저렴한데 튼튼하고 위생적이기까지 한 소재. 현대 문명은 플라스틱의 등장을 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처음 등장한 이 혁신적 소재는 코끼리 상아(당구공)와 거북이 등껍질(머리빗), 깍지벌레 분비물(도료·절연재·레코드) 같은 천연소재 자리를 대체했죠. 1940년 5월 ‘실크처럼 윤기 난다’고 광고한 듀폰의 나일론 스타킹은 미국 뉴욕에 출시된 첫날에만 무려 80만 켤레가 팔려나갔어요.

1920~30년대 초기 플라스틱 산업은 원유와 천연가스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쓸모없는 폐기물을 활용하려는 석유기업의 열망에서 탄생했습니다. 이걸 획기적으로 키운 건 제2차 세계대전이었죠. 낙하산, 항공기 부품, 로프, 헬멧 내피 등 수많은 군수품에 플라스틱이 필요했고요. 미국 정부가 석유화학 공장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면서, 전쟁 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4배로 급증했죠.

1946년 1월 30일 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사진. 전쟁이 끝나고 뉴욕의 백화점에서 드디어 다시 듀폰 나일론 스타킹 판매를 시작했단 소식에 스타킹을 사려는 여성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1946년 1월 30일 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사진. 전쟁이 끝나고 뉴욕의 백화점에서 드디어 다시 듀폰 나일론 스타킹 판매를 시작했단 소식에 스타킹을 사려는 여성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플라스틱의 전성기는 본격적으로 열립니다. 석유화학 공장을 헐값에 인수한 민간 기업들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정용 소비재를 쏟아냈기 때문이죠.

미국 해병대 구명정에 쓰였던 폴리스티렌은 일회용컵과 아이스박스가 됐고, 영국군이 레이더용 고주파 케이블에 썼던 폴리에틸렌은 마트 비닐봉지와 음식 보관용기로 탈바꿈합니다. 손가락 하나로 들 수 있는 여행 가방, 강철처럼 튼튼한 낚싯줄,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는 투명 포장재, 유리로 조각한 듯한 인공 꽃. 플라스틱 신제품이 열어준 새로운 풍요의 시대에 소비자는 열광했죠. “다양한 시장에서 플라스틱은 전통적인 소재에 도전해 승리했습니다. 자동차에서는 강철을, 포장재에서는 종이와 유리를, 가구에서는 목재를 대체했죠.” (‘플라스틱: 독성 사랑 이야기’ 저자 수잔 프라인켈)

플라스틱이 연 풍요의 시대
1960년대, 플라스틱은 한국인의 일상에서도 흔해집니다. 덕분에 이전엔 없는 생활상이 나타났죠. 대나무 살의 일회용 비닐우산은 ‘비 오는 날의 새로운 풍물’로 자리 잡았고, 아이들은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파는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불량식품 주스를 사 먹었어요. 두부를 담는 목판은 위생을 이유로 플라스틱판으로 바뀌었고, 질기고 저렴한 화학섬유 옷감이 농촌 아낙네의 일상복이 됩니다. 종이장판 대신 집집마다 비닐 장판이 깔렸고요.

하지만 신소재 플라스틱에 대한 열광은 1970년대부터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일부 플라스틱 제품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됐다는 소식이 국내외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죠. 이어 1980년대 들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넘쳐나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사회문제화됐고요. 1990년대 말엔 환경호르몬에 대한 공포(생식기능을 저하시킨다)가 극에 달했죠.

플라스틱의 이미지는 추락했지만, 플라스틱 산업의 성장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폭발적인 생산량 증가세를 이어갔죠. 1950년대 200만t이던 전 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2000년대 초반 2억t을 넘어섰고, 2024년엔 4억6000만t으로 늘었습니다. 이제 플라스틱은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플라스틱 마루가 깔린 집에서 플라스틱 베개를 베고 자고, 플라스틱 통에 담긴 물을 마시고, 플라스틱 칫솔로 이를 닦고, 플라스틱 키보드 치고 있죠.

매일 쓰는 칫솔부터 컴퓨터, 냉장고, 자동차까지. 세상은 온통 플라스틱이다. 게티이미지
매일 쓰는 칫솔부터 컴퓨터, 냉장고, 자동차까지. 세상은 온통 플라스틱이다. 게티이미지


사실상 우리는 플라스틱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플라스틱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해 주는 필수 요소가 되어버렸어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플라스틱 없이 면과 모, 종이와 목재, 금속 같은 천연소재에만 의존한다면? 건축이나 제품 생산 기간은 더 길어질 거고요. 천연재료는 공급을 마음대로 늘릴 수 없어서 제품 생산량에도 한계가 있겠죠. 대부분 제품 가격은 지금보다 비쌀 수밖에 없고요. 아마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생필품들이 소수 부유층만 누리는 귀한 물건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결국 값싸고 풍부한 플라스틱이 있기에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생산과 소비의 끊임없는 확장이 가능했어요. ‘탈 플라스틱’이 생각처럼 쉽지 않고 어쩌면 불가능한 이유이죠.

이란전쟁으로 강제 ‘탈 플라스틱’?
이란전쟁은 평화롭던 플라스틱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놨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나프타 수입이 꽉 막혔기 때문이죠. 나프타는 석유를 증류해서 나오는 액체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석유화학 산업은 NCC(나프타분해시설)를 통해 이 나프타를 분해해서 에틸렌과 프로필렌을 생산하고요. 이 기초유분으로 폴리에틸렌이나 폴리프로필렌 같은 플라스틱을 만드는데요.

해상을 통해 들여오던 중동산 나프타 수입 물량 자체가 사라져 버렸어요. 한국은 국내 나프타 수요의 45%를 수입하고, 그중에서도 중동산 의존도가 높았기에(77%) 큰일이 아닐 수 없죠.

부랴부랴 비상 대책이 가동됐습니다. 정부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나프타의 해외 수출을 막았어요. 물론 그것만으론 턱없이 모자라지만 일단 있는 거라도 지키려는 거죠. 아울러 4년 만에 처음으로 러시아산 나프타를 수입했어요. 미국이 한 달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풀어줬기에 가능했는데요. 고작 반나절치 물량(2만7000t)만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 남은 나프타 재고량은 2~3주 치 물량. 이대로 가면 줄줄이 셧다운(가동 중단)이 불가피하단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나프타 가격의 최근 3개월 추이. 전쟁 직전과 비교해 100% 가까이 뛰었다. 산업통상부 원자재가격정보
나프타 가격의 최근 3개월 추이. 전쟁 직전과 비교해 100% 가까이 뛰었다. 산업통상부 원자재가격정보

나프타 가격은 이미 전쟁 전과 비교해 두배로 올랐습니다(미터톤 당 633달러→1241달러). 하지만 물량 자체가 없기 때문에,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인 판국이죠. 충격파는 곳곳에 미치고 있습니다. 페인트 업체들은 제품 가격을 줄줄이 15~40% 올렸고요. 식품 포장용 비닐 가격은 일주일 만에 1000장에 6만원에서 11만7000원으로 뛰었습니다. 포장 용기 가격이 40% 오르면서 음식점은 배달 장사를 못하겠다며 울상이고요. 화장품 업계는 용기 생산이 중단될까봐, 제약 업계는 약과 수액제 포장재가 떨어질까봐 전전긍긍입니다. 파종을 앞둔 농가는 농업용 비닐이 부족하고, 의류업계엔 합성섬유 가격 급등이 현실화됐죠.

갑자기 모든 업계가 강제적인 ‘탈 플라스틱’ 상황에 처했습니다. 라면 봉지, 화장품 용기만 따로 살 일이 없는 소비자들은 당장은 잘 실감하지 못할 수 있는데요. 공급 불안이 초래한 부담은 결국 소비자 가격에 전가되기 마련이죠. 먹을 것과 입을 것, 소비재와 내구재 할 것 없이 가격이 뛰는 결과로 이어질 겁니다.

전쟁으로 기름값을 그렇게 걱정했는데, 더 큰 복병이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3차 오일쇼크보다 더 무서운 첫 번째 나프타 쇼크인 거죠. 사실상 전에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위기입니다.

기초원료인 나프타 품귀로 인해 비닐 포장재와 포장용기를 포함한 모든 관련 제품의 생산이 위협받고 있다. 사진은 경기도 광주시의 한 플라스틱 용기 제조업체. 뉴시스
기초원료인 나프타 품귀로 인해 비닐 포장재와 포장용기를 포함한 모든 관련 제품의 생산이 위협받고 있다. 사진은 경기도 광주시의 한 플라스틱 용기 제조업체. 뉴시스


한편 한국뿐 아니라 일본·싱가포르·태국·인도네시아 등 온 아시아가 나프타 쇼크로 난리인 가운데, 정작 전쟁 당사자 미국의 석유화학 업계는 평온합니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멀어서가 아니라, 원료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죠.

천연가스가 풍부한 미국은 나프타(석유에서 나오는 액체) 대신 에탄(천연가스에서 나오는 기체)으로 에틸렌을 생산해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든, 나프타 가격이 널뛰든, 원료 공급엔 아무 지장이 없죠. 오히려 전 세계 플라스틱 가격이 뛰었으니 마진만 폭증합니다. 미국 석유화학기업 다우(Dow) 주가가 한 달 새 35% 넘게 뛴 건 다 이유가 있죠.

혹시 그래서 이 전쟁이 길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에너지 순수입국 신세가 처량합니다.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4월 3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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