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슈가 러시’…러시아 시민들이 마트로 달려간 이유[김수현의 세계 한 조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21일 11시 17분


코멘트

당신이 잠든 사이, 오늘 밤에도 세상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중입니다. 지난 밤 당신이 놓쳤을 수도 있는 세계 각국의 소식들, ‘세계 한 조각’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만사, “잠깐! 왜 이러는 거지?” 여러분의 궁금증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뉴(New) 슈가 러시
트위터에 올라온 러시아의 한 마트 모습. 설탕을 비축하기 위해 구름같이 모인 시민들에게 마트 직원이 설탕을 배분하고 있다. 설탕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일부 시민들 간에는 실랑이도 발생했다.
트위터에 올라온 러시아의 한 마트 모습. 설탕을 비축하기 위해 구름같이 모인 시민들에게 마트 직원이 설탕을 배분하고 있다. 설탕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일부 시민들 간에는 실랑이도 발생했다.

트위터에 올라온 러시아의 한 마트 모습. 설탕을 비축하기 위해 구름같이 모인 시민들에게 마트 직원이 설탕을 배분하고 있다. 설탕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일부 시민들 간에는 실랑이도 발생했다.
트위터에 올라온 러시아의 한 마트 모습. 설탕을 비축하기 위해 구름같이 모인 시민들에게 마트 직원이 설탕을 배분하고 있다. 설탕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일부 시민들 간에는 실랑이도 발생했다.


‘슈가 러시(sugar rush)’, 서구권에서는 사탕처럼 단 음식을 먹고 극도의 행복감을 느낄 때 흔히 슈가 러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최근 러시아에서는 다른 의미의 ‘슈가 러시’가 등장했습니다. 계속되는 서방 세계의 제재에 불안감을 느낀 러시아 시민들이 설탕을 구하기 위해 마트로 달려가는, 그야말로 설탕을 향한 ‘질주’가 시작된 것입니다.

러시아 중서부 첼랴빈스크 지역의 한 마트. 물건을 정리하는 직원의 조끼에 러시아어로 “설탕 없음”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러시아 중서부 첼랴빈스크 지역의 한 마트. 물건을 정리하는 직원의 조끼에 러시아어로 “설탕 없음”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러시아 사라토브 지역에서 사람들이 설탕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러시아 사라토브 지역에서 사람들이 설탕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냉전을 겪어본 구(舊)소련 현(現) 러시아의 중장년층들에게 식품의 보존 기간을 늘려주는 설탕은 비상 시 꼭 비축해야 할 필수품입니다. 설탕 품귀 현상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이미 텅 빈 마트 매대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러시아 전역에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16일 러시아의 설탕 가격은 전주 대비 12.8%로 상승했으며 러시아는 8월 31일까지 대부분의 설탕 수출을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설탕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11일 러시아의 연간 물가상승률은 2015년 이후 최고 수준인 12.54%를 기록했습니다. 지난달 러시아 내 식품 가격도 11.46% 상승했습니다. 서방의 전례 없는 제재에 루블은 폭락 중입니다.

◆1루블 < 1센트


12일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에 올라온 영상. 러시아의 쇼핑몰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한 남성이 루블을 뿌리고 있다.
12일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에 올라온 영상. 러시아의 쇼핑몰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한 남성이 루블을 뿌리고 있다.


8일 미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를 발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제 루블은 미국의 1센트보다도 적은 가치”라고 말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이었던 올해 초 달러/루블 환율은 1달러 당 약 75루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의 ‘원유 제재’가 임박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지자 7일 루블은 장중 1달러 당 158루블 수준으로 추락합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제공 달러/루블 환율 그래프. 7일 사상 최저치를 기록한 러시아 루블은 이날 연초 대비 90% 이상 폭락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제공 달러/루블 환율 그래프. 7일 사상 최저치를 기록한 러시아 루블은 이날 연초 대비 90% 이상 폭락했다.

추락하는 루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요? 내 손에 루블이 없으면 됩니다. 이미 1998년 심각한 금융 위기를 겪은 러시아인들은 곧장 루블을 외화로 환전하기 위해 은행으로 달려갑니다. 그럼, 외화가 필요한 국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외화를 못 가져가게 막으면 됩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9월 9일까지 6개월 간 루블화 외화 환전을 중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지난달 25일 러시아 샹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현금자동입출입기(ATM) 앞에 달러나 유로화를 인출하기 위해 모인 러시아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지난달 25일 러시아 샹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현금자동입출입기(ATM) 앞에 달러나 유로화를 인출하기 위해 모인 러시아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그래 결심했어! 푸틴 대 $



“이 자산은 해방됐다(This property has been liberated)!” 14일 영국 런던의 한 대저택이 열 명 정도 되는 시민들에게 무단 점거됩니다. 그런데, 말리는 사람도, 심지어는 집주인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무단 점거자들’ 뒤로 우크라이나 국기가 보입니다. 이 저택은 러시아의 ‘알루미늄 재벌’ 올렉 데리파스카 소유로 알려집니다. 그는 10일 영국 정부가 자산 동결 조처를 내린 7인의 러시아 부호 중 한 명입니다.

‘합법 점거’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 서방 국가들의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제재가 본격화되자 유럽 전역에는 각국 정부의 올리가르히 자산 압류 조처로 ‘주인 잃은’ 초호화 요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푸틴 소유로 추정되는 7억 달러(약 8400억 원) 정도의 슈퍼요트 ‘셰에라자드 호’가 발견됐으나 압류되지는 않았습니다.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초호화 요트들의 잇따른 압류 속에서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직접 이들의 요트를 추적하고 있다는 
시민들이 등장하고 있다. 사진은 트위터 계정 ‘Sanction Ahoy!(제재 아호이!)’의 추적 ‘인증’ 게시물.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초호화 요트들의 잇따른 압류 속에서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직접 이들의 요트를 추적하고 있다는 시민들이 등장하고 있다. 사진은 트위터 계정 ‘Sanction Ahoy!(제재 아호이!)’의 추적 ‘인증’ 게시물.


사실 이미 2014년 러시아의 크름 반도 강제 병합 이후부터 올리가르히에 대한 서방의 제재는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회계사를 동원해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세우고, 그 밑에 또 다른 유령회사를 둬 지배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며 이들은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갔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데는 서방 국가의 ‘미온적 대처’도 한몫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영국은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런던그라드(Londongrad·러시아 재벌들이 영국 런던을 통해 자산을 빼돌리는 것을 비꼬는 말)’ 시대의 종말을 선언했습니다. 2014년 당시 제재에 불참한 중립국 스위스마저도 5명의 올리가르히에 대한 입국을 금지했습니다. 현재까지 약 100조 원 가량의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자산이 증발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푸틴 대 돈. 이제 푸틴의 ‘친구들’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SWIFT 퇴출


통상적으로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송금을 하거나 또는 해외에서 결제를 할 경우, ‘돈’은 다수의 은행을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각 기관에게 “이 거래는 진짜야! 숫자들도 다 정확해”라고 한 번에 말해주는 ‘메신저’가 있으면 거래는 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입니다.

SWIFT는 1973년 15개국 239개 은행에서 ‘국경 간 결제’의 신속하고 안전한 처리를 목적으로 결성된 금융기관 간 일종의 보안메시지 시스템입니다. 현재는 200여 국가(이란·북한 제외)의 금융기관 1만1000곳 이상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SWIFT가 직접 돈 거래를 처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서 퇴출되면 러시아는 무역, 외국인 투자, 해외 송금, 무엇보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경제 운용에 필요한 정보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사실상 국제 금융 거래나 해외 결제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러시아 내 애플·구글페이가 막힌 이후 개찰구 앞에 사람들이 지하철 요금을 내기 위해 현금을 찾아 헤매면서 긴 줄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내 애플·구글페이가 막힌 이후 개찰구 앞에 사람들이 지하철 요금을 내기 위해 현금을 찾아 헤매면서 긴 줄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6일 러시아 주요 은행의 SWIFT 결제망 퇴출을 선언한데 이어 2일 EU는 국영은행인 VTB를 포함한 러시아 은행 7개이 포함된 공식 퇴출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해외 결제가 불안정해지자 금융결제 서비스인 애플·구글페이는 러시아 내에서 중단됩니다. 지하철 요금조차 카드 결제가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자국 은행이 발행한 신용카드 사용은 문제 없다”라고 밝혔지만, 두려움에 빠진 시민들은 다시 한 번 은행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국가 부도의 날’ 우려도

푸틴 대통령은 이번 제재에 대해 “새로운 현실을 마주한 러시아 경제는 깊은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며, 이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러시아 경제가 타격을 입었다는 점을 사실상 시인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제재로 전체 러시아 GDP의 최대 7% 정도가 증발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16일, 러시아 ‘국가 부도의 날’이 도래했습니다. 러시아의 1억1700만 달러(약 1400억원) 규모의 국채 이자 상환 만기일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이날 러시아는 이자를 지급했다고 주장했으나, 서방의 제재로 이자 지급 처리는 다음 날 오후에 겨우 확인됐습니다.

이자 상환 확인이 늦어지자 국제 신용평가사 S&P는 러시아의 국가 신용 등급을 CCC-에서 CC로 한 단계 하향 조정했습니다. 이는 최하 단계인 ‘D’보다 고작 두 계단 위 수준입니다. 러시아는 이번 연말까지 약 400억 달러(48조 원)를 상환해야 합니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