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부는 9일(현지 시간) 북한이 한국을 ‘적’으로 규정하며 남북 간 모든 연락채널을 끊은 것에 대해 “북한의 최근 행보에 실망했다”고 밝혔다. ‘실망’이라는 이례적 표현과 함께 북한의 발표 직후 현지 시간으로 이른 아침에 신속하게 반응을 내놓으며 북한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북한의 움직임에 대한 입장을 묻는 동아일보의 질의에 “미국은 언제나 남북관계 진전을 지지해왔다”며 북한에 실망했다는 답변을 내놨다. 김여정의 첫 담화가 나왔을 때만 해도 ‘남북 협력 지지’ 및 ‘비핵화 진전에 발맞춘 남북 협력’이 담긴 기존의 원칙론을 반복했으나 이번에는 한층 수위를 높인 반응이다. 그는 이어 “우리는 북한이 외교와 협력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한다”며 “우리는 북한을 관여시키려는 노력에 있어서 동맹국인 한국과 긴밀한 협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북한을 향해 ‘실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례적이다. 작년 말 북한이 ‘성탄절 선물’을 거론하며 도발 가능성을 시사했을 당시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같은 고위당국자들이 잇따라 유사한 언급을 내놓기는 했으나 당시에는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도발한다면)” 같은 가정을 전제로 한 경고였다. 그만큼 이번에는 미국이 북한의 최근 움직임을 민감하게 보면서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한 대응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의 적대적 태도 변화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2주년(6월12일)을 코앞에 두고 나온 것. 미국 내에서는 북한의 대남 메시지가 결국은 간접적으로 미국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향한 우회적인 경고이자 한국 정부를 지렛대로 삼아 하반기에 미국의 제재 완화 등 양보를 얻어내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남한을 겨냥한 북한 전역의 시위가 어느 순간 대미 시위로 방향을 바꿀 가능성도 열려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선을 불과 5개월 남겨놓은 시점에 북한이 미국을 향해 무력시위나 도발을 감행함으로써 대선판을 흔들 가능성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인종차별 항의 시위 대응을 둘러싼 논란과 그 과정에서 추락한 지지율, 계속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경제적 여파 등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의 협상에 나설 여력도 거의 없는 상황. 연말까지 상황 관리에 주력할 가능성이 높다. 워싱턴의 외교소식통은 “아직 미국을 향한 직접적인 발언이나 움직임이 없는 만큼 현재로서는 한국과 긴밀히 협의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단계”라고 전했다.
워싱턴 전문가들은 북한의 행보가 결국 한미 동맹을 흔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재완화, 대북전단 살포 금지 등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려는 한국 정부와 이에 부정적인 미국 간 갈등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마크 패츠패트릭 연구원은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북한이 남북한 간 모든 통신채널을 완전 차단한 것은 궁극적으로 미-한 동맹의 균열을 일으키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북한이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과거의 낡은 각본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며 “이 각본에서 단 하나의 새로운 요소는 북한이 미-한 동맹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동아일보에 “북한 정권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의 교착 상태에서 높아진 워싱턴과 서울 간 긴장을 이용하려 할 것”이라며 “최근 미국이 주독 미군을 감축할 것이라는 보도는 동맹 간의 균열을 노리는 북한에 기회를 열어주는 셈”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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