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열릴 것으로 예정됐던 미-러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시켰다. 최근 벌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함 나포 사태를 규탄하기 위해 회담을 취소했다는 것이 백악관의 공식 입장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스캔들’로 정치적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그림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29일(현지 시간) G20 정상회의 개최지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에 오른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억류 중인) 선박과 선원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며 “푸틴 대통령과의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라고 적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군함을 나포해 빚어진 양국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미-러 정상회담을 취소한 것이다.
회담 취소 결정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에어포스원에 오르기 직전인 29일 오전 10시 반경 기자들과 만나서는 “회담 취소를 생각해보긴 했지만 아직 그렇게 하진 않았다”며 “회담을 열기에 아주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불과 한 시간 후 자신의 트위터에 회담 취소를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현지 언론은 새러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에어포스원에서 존 켈리 비서실장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과 논의를 나눈 뒤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30일 회담 취소에 대해 “미국 행정부의 결정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타스통신이 전했다.
하지만 회담이 취소된 배경에 트럼프 대통령이 마주한 녹록치 않은 국내적 정치 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는 관측도 많다. 회담 취소가 결정된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의 전직 개인 변호사이자 심복이었던 마이클 코언은 지난해 자신이 의회에서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해 위증했다고 인정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후로도 러시아에서 사업을 펼치려는 논의를 진행했다고 폭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출국하기 전 기자들에게 “선고 형량을 가볍게 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나약한 사람”이라며 코언을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하지만 반(反)트럼프 진영은 이를 트럼프 대통령이 친(親)러 성향을 보인 배경 중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7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을 적극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론의 맹비난을 받은 바 있다. 이번 회담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해당 의혹과 관련해 러시아에 강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러시아 스캔들’이 파장이 더 커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마이클 카펜터 펜실베이니아대 바이든센터 선임국장은 뉴욕타임스(NYT)에 “(회담 취소는) 코언의 폭로가 나온 상황에서 그려진 정치적 그림”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미-러 정상회담이 취소돼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러가 1987년 체결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파기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양국 정상이 해당 갈등에 ¤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G20 정상회의는 시작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연이은 ‘깜짝쇼’에 뒤숭숭한 분위기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의 회담을 ‘다운그레이드’시켰다”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미-러 회담 취소 말고도) 다른 드라마들로 끓어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9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출발했으나 전용기가 고장 나 쾰른에 비상착륙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이로 인해 메르켈 총리는 G20 정상회의 개막식 참석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한기재기자 recor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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