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획]수영장 바닥이 30cm씩 쑥… 장애정도 따라 맞춤 조절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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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장애인 교육·재활 현장을 가다

미국의 장애인들이 노스리지 캘리포니아주립대에 있는 장애인재활센터에서 조교(왼쪽)의 도움을 받으며 수중 치료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성취센터 홈페이지
미국의 장애인들이 노스리지 캘리포니아주립대에 있는 장애인재활센터에서 조교(왼쪽)의 도움을 받으며 수중 치료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성취센터 홈페이지
선뜻 정답을 찾기 쉽지 않은 질문 하나. 가난한 지역의 공립학교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입학했다. 오래된 건물들이라 엘리베이터가 없다. 설치하려면 그해 학교에 배정된 예산의 80%를 써야 한다. 나머지 500명의 비장애인 학생에게 돌아갈 혜택이 크게 줄어든다. 한 명을 위해 다수의 학생이 희생하는 게 공정한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해 장애인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미국을 찾았다. 지난해 대한장애인체육회가 전국의 초중등 일반학교 및 특수학교 교사를 상대로 실시한 ‘통합체육교실’ 프로그램에서 우수교사로 뽑힌 교사 4명과 장애인체육회 생활체육부 및 국립특수교육원 직원의 연수 현장을 본보가 함께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벨몬트 고교에서 발달장애 학생들이 7인제 축구를 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벨몬트 고교에서 발달장애 학생들이 7인제 축구를 하고 있다.
장애·비장애 학생 혼성 팀 꾸려 축구대회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벨몬트 고교. 지난달 22일(현지 시간) 이 학교 운동장에서는 장애 학생들의 7인제 축구 경기가 열렸다. 로스앤젤레스통합교육국(LAUSD)이 주관하는 대회다. 로스앤젤레스는 지역이 넓고 학생도 많아 6개 디비전으로 나뉜다. 벨몬트 고교는 그중 센트럴 디비전에 속해 있다. 오전 9시 30분이 넘자 ‘LAUSD’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노란색 장애인 전용 버스들이 운동장 입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회에 출전한 다른 학교 학생들을 싣고 온 버스다. 이날 참가한 학교는 모두 6곳. 센트럴 디비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학교가 있지만 의무적으로 출전할 필요는 없다. 이 6곳은 교사가 참가 신청을 한 학교다.

“하이! 하이!” 경쾌한 음악에 맞춰 이 학교 특수체육 수업을 맡고 있는 케빈 마 교사(41)가 춤을 추며 학생들에게 인사를 했다. 장애 학생들도 반갑게 눈을 맞춘다. 한국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마 교사의 소속은 이 학교가 아닌 로스앤젤레스통합교육국이다. 그는 유치원부터 고교까지 통합교육국이 관할하는 학교를 순회하며 장애 학생들에게 특수체육을 가르친다.

“이 학교에는 장애 정도에 따라 편성된 3개의 특수학급이 있다. 장애가 심한 학생들은 보조교사가 일대일로 따라다닌다. 많은 장애 학생이 경기를 뛰고 싶어 하지만 모두 할 수는 없다.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대회 참가를 포기하는 학교가 꽤 있다.”

마 교사의 설명을 듣던 국립특수교육원 조연길 교육연구사(44)가 “장애 학생들의 스포츠 대회는 한국에서도 많이 열린다”고 말했다. 마 교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래서 오늘은 아쉽다”며 말을 이어갔다. 이날은 장애 학생들만의 대회였지만 장애·비장애 학생 혼성팀을 위한 축구대회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7인제인데 장애인 4명, 비장애인 3명으로 팀을 꾸려야 한다. 처음에는 비장애 학생만을 위한 경기였다. 장애 학생들을 따돌리고 자기네끼리 골을 넣는 것에만 신경 썼다. 룰을 바꿨다. 장애 학생의 득점만큼만 비장애 학생들의 골로 인정했다. 장애 학생이 득점하지 못하면 비장애 학생이 아무리 많은 골을 넣어도 0점이다. 비장애 학생들이 장애 학생들에게 패스를 하기 시작했다.”

규칙을 손질했더니 따로 놀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경기로 변했다. 듣던 교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10시부터 경기가 시작됐다. 벨몬트 고교의 두 번째 상대는 치어리더까지 동원했다. 장애 학생으로 구성된 치어리더 팀은 교사들과 어울려 신나게 춤을 추며 응원했다. 관중석에는 비장애인 학생들이 모여 앉아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열심히 응원하는 학생도 있지만 경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학생도 있었다. 마 교사는 “체육 수업의 일환이지만 비장애 학생들이 꼭 참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 참가하면 대학 입학 때 봉사 경력을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차베스 중학교에서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어울려 체육교사 제니퍼 로페즈 씨에게 ‘스피드민턴’ 수업을 받고 있다. 샌버너디노=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차베스 중학교에서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어울려 체육교사 제니퍼 로페즈 씨에게 ‘스피드민턴’ 수업을 받고 있다. 샌버너디노=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지역사회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장애인재활센터

노스리지 캘리포니아주립대는 23개나 되는 캘리포니아주립대 중 규모가 큰 편이다. 웬만한 국내 대학 10개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캠퍼스도 넓다. 이 학교는 미국에서 장애 학생이 다니기에 좋은 대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모든 건물이 평지에 있고 휠체어 이동로가 확보돼 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 학생의 경우 특수체육과 학생들이 일대일로 짝을 맺어 학교생활을 돕는다. 정치인 등 VIP들이 이 학교를 방문하면 꼭 가는 곳이 있다. 성취센터라고 이름 붙은 장애인재활센터다.

센터는 1971년에 설립됐다. 특수체육을 전공한 당시 스포츠학부 운동과학과(kinesiology) 교수가 장애 학생 한 명의 재활치료를 위해 만들었다.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작았던 센터는 조금씩 커졌다. 지금의 규모를 갖춘 것은 2003년이다. 하루에만 장애인 수백 명이 이곳을 찾는다.

“이 풀을 보세요. 깊이가 최대 7피트(약 2.13m)인데 바닥을 1피트(약 30cm)씩 조절할 수 있습니다. 장애 정도와 유형에 따라 물의 깊이를 달리하는 거죠. 예를 들어 폐 질환이 있는 장애인은 깊은 곳에서 수영을 못하니까요.”

센터 코디네이터 김유미 씨가 설명했다. 김 씨는 이 대학 운동과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김 씨의 설명과 함께 시설을 둘러봤다. 바닥 높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이동식 풀을 포함해 ‘아쿠아틱 세러피’를 위한 수영장만 4개다. 물리치료실에는 종합병원에서도 보기 힘든 ‘틸팅 테이블(장애인들의 기립훈련을 돕는 기구)’이 즐비하다. ‘랜드 세러피’를 하는 곳은 특급호텔 헬스장을 방불케 한다. 다른 점은 모든 기구가 휠체어를 탄 채로 이용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는 것이다.

이 센터의 책임자는 운동과학과 정태유 교수(42)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체육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와 노스리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시설은 대형 종합병원보다 낫지만 이용자는 한 학기에 20달러(약 2만2700원)만 내면 된다.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웃음). 센터에 등록한 장애인들은 일대일 재활치료를 받는다. 잘 훈련된 학생과 조교들이 그들의 재활을 도와준다. 학생들도 얻는 게 많다. 생생한 임상자료를 연구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이득을 얻는 관계다.”

풀타임 시설관리자만 8명인 이 센터의 1년 운영비는 약 150만 달러(약 17억 원). 20달러의 이용료를 받아서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금액이다. 그렇다고 주정부나 대학이 재정을 지원해 주는 것도 아니다. 미국 대학들은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돈이 안 되는 학과를 없애는 일은 다반사다. 센터를 유지하려면 이용료를 크게 올려야 하고 저소득층 장애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된다.

센터가 유지되고 발전하는 비결은 기부금이다. 좋은 시설과 일대일 맞춤형 재활치료에 만족한 장애인이나 그 가족들이 거금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도 파킨슨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자녀가 이 학교 학생이 하는 파킨슨병 관련 발표를 듣고 100만 달러(약 11억4000만 원)를 기부했다. 정 교수는 “돈 잘 버는 사람이 소득의 70%를 세금으로 내고, 이 돈으로 복지사회를 유지하는 북유럽 국가들은 말 그대로 장애인들의 천국이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 그 대신 개인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전통이 있다. 그 덕분에 우리 센터가 유지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미국 연수에 참가한 대한장애인체육회, 국립특수교육원 직원과 교사들.
미국 연수에 참가한 대한장애인체육회, 국립특수교육원 직원과 교사들.
“문화는 만드는 게 아니라 배양되는(cultivated) 것”

연수에 참가한 교사들은 일정 첫날 당혹감을 느꼈다. 샌버너디노 캘리포니아주립대를 방문해 이 학교 운동과학과 학과장인 테리 리조 교수를 만났을 때다. 특수체육 권위자인 리조 교수는 “지난 40년 동안 미국의 장애인 체육은 많이 발전했다. 이전에는 장애인을 위한 변변한 시설도 없었다. 하지만 최근 연방정부와 일부 주정부가 장애인 체육 예산을 삭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에 비해 한국의 장애인 체육 정책은 정말 잘돼 있다. 우수하고 부러운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선진국인 미국에서 뭔가를 배우려고 온 교사들에게 한국의 현실이 부럽다는 것이었다.

이 학과에서 특수체육을 가르치고 있는 오현경 교수에 따르면 미국에는 장애 학생만 입학하는 특수학교가 없다(시각과 청각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학교는 제외). 장애 학생은 모두 일반학교 내 특수학급에 편성된다. 장애인은 법적으로 21세까지 무상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장애인이 입학하면 시설과 보조교사 지원 등 예산이 크게 증가한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 장애 학생을 받지 않으려는 학교가 늘고 있다고 오 교수는 전했다. 물론 이에 따른 법적 분쟁도 늘었다.

일정 이틀째에 찾은 캘리포니아 주 샌버너디노 카운티의 차베스 중학교. 제니퍼 로페즈 교사가 보조교사 1명과 함께 체육 수업을 했다. 농구 코트에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학생 40여 명은 잠실종합운동장보다 큰 운동장에서 서킷 트레이닝(신체 각 부위를 단련할 수 있는 운동을 조합하여 일정 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면서 하는 훈련)과 ‘스피드민턴’(무거운 셔틀콕을 사용해 바람 부는 야외에서도 할 수 있는 배드민턴) 수업을 받았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로페즈 교사는 “학생들 중에 발달장애인이 2명 있다”고 말했다.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찾을 수 없었을 정도로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은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체육활동을 했다. 로페즈 교사는 “물론 장애 정도가 심하면 별도로 지도한다”고 설명했다.

전제욱 인천 인제고 교사는 “모든 학생이 즐겁게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국내의 통합체육수업은 장애 학생에게 비장애 학생과 동등한 수준을 요구하곤 하는데 이곳은 비장애 학생과 어울리는 활동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선천적 장애인은 줄었지만 후천적 장애인은 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비만까지 포함하면 인구의 30% 이상이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얘기다. 게다가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 65세 이상 인구의 3분의 1이 특별한 운동 처방을 받아야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잠재적 장애인인 셈이다.

미국의 장애인 정책이 40여 년에 걸쳐 골격을 갖췄다면 한국은 최근 20년 사이에 급격히 발전했다. 장애인을 격리했던 시기를 지나 유형별 특수학교가 등장했고 이제는 통합교육으로 가는 추세다. 한국은 1994년 ‘특수교육진흥법’을 전면 개정해 장애인에 대한 무상·의무교육 및 차별 금지 등을 명문화했다. 하지만 당시 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요건을 채우기 위해 만든 것이라 현실과는 괴리가 있었다.

현재는 2008년부터 시행된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에 근거하고 있다. 장애인과 장애학생의 학부모 등 수요자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만들었기에 법률만 보면 미국의 특수교육 관계자들이 부러워할 만하다. 하지만 현장에서 장애인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법과 제도 등은 잘 정비돼 있어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장애인이 살아가기 힘든 사회라는 게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파트 단지 옆에 장애인 시설을 짓는다고 하면 “집값 떨어진다”며 반대하고, “우리 아이 학급에는 장애인을 넣지 말라”며 민원을 넣는 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연수 참가자들이 입을 모아 부럽다고 한 노스리지대 장애인재활센터의 책임자인 정 교수는 이 말을 강조했다.

“제도는 쉽게 바꿀 수 있지만 문화는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문화(culture)는 배양되는(cultivated)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장애인#장애인 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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