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라며 가족 협박… 우익에 맞서 싸울것”
“1991년 김학순 할머니 증언 충격… 기사 나간뒤 ‘날조’ 매도에 낙담”
“어두운 역사 입막으려는 세력 활개… 반증위해 날 공격한 곳에 글 보내”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응시하려는 사람을 공격해 기를 꺾으려는 세력이 2014년 일본에 있다. 거기 굴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다. 너도 함께 일어서 맞서라고 젊은 날의 내가 외치고 있다.”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였던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처음 아사히신문에 보도한 이후 20여 년간 우익의 협박에 시달려온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56·사진) 씨가 일본의 시사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 신년호에 27쪽 분량의 수기를 게재했다. 분게이슌주는 일본의 대표적인 우파 월간지로 1992년 4월호에서 우에무라 씨의 기사를 처음 공격했다. 우에무라 씨는 “반증을 위해 분게이슌주에 수기를 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9일 입수한 수기에서 우에무라 씨는 “1990년부터 위안부 체험을 이야기해줄 사람을 한국에서 찾아다녔다”고 밝혔다. 평화 관련 기획 기사를 쓰려는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증언하려는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당시 나는 32세였다. 식민지 조선을 수탈한 일본의 젊은이에게 이야기해 줄 리가 없었다”고 적었다.
그는 이듬해인 1991년 8월 10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소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수록한 녹음을 처음 들었다. 17세 때 속아서 중국 남부의 위안소로 끌려가 200∼300명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수기에서 “놀랐고 전율했다. 드디어 할머니들이 무거운 입을 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의 기사는 이튿날 아사히신문에 게재됐다.
하지만 우익들은 김 할머니의 증언이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그의 기사가 날조라고 공격했다. 그는 수기에서 “증언이 일관되지 않아 강제연행인지, 속았는지, 인신매매인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김학순 증언에는 한 가지 일관된 점이 있다. 의지에 반해 위안부가 돼 일본군 장병의 성의 상대를 강요받았다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몸담은 대학과 가족들에게 쏟아진 우익들의 협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했다. 특히 ‘자살할 때까지 압박할 수밖에 없다’는 글과 함께 우에무라 씨의 고교생 딸의 사진을 내건 반한(反韓) 블로그에 대해 “내가 기사를 쓸 때 태어나지도 않은 17세 소녀 사진이 왜 노출돼 온갖 욕설을 뒤집어써야 하는가”라고 분노했다.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대학이 우익들의 협박에 자신을 내쫓으려 하자 그는 시민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9월부터 대학에 격려 메일이 쏟아졌다.
우에무라 씨는 비장한 각오로 수기를 끝맺었다. “나는 23년 전 오사카의 한 잡지에 김학순 등장을 알리며 ‘다시 일본에 던져진 조선인 종군위안부 문제’라는 제목으로 썼다. ‘다시 던져진 문제‘는 32세의 사회부 기자 우에무라가 56세의 비상근 강사 우에무라에게 제기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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