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워 시프트]<1> 미국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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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력 추락… 군사 리더십 휘청
20년 ‘슈퍼 파워’ 저무나

《 지난해 12월 초 워싱턴에서 미국 국가정보국(DNI) 산하 국가정보자문회의(NIC) 주최로 미국의 위상을 전망하는 ‘글로벌 트렌드 2030’ 회의가 열렸다. 세계 17개국 정부와 유럽연합(EU) 관계자, 유엔, 세계은행, 5개 대학, 9개 싱크탱크 전문가들이 참석한 이 비공개 회의에서 미국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발언들이 쏟아졌다. “미국은 밑으로 떨어지는 미끄럼틀을 탔다. 추락은 막을 수 없는 대세다. 미국은 세계를 이끌 만한 능력도 없고 자제력도 상실했다.” 경제 전문가인 유리 다두시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이사는 미국 경제가 향후 20년간 연평균 1.5%의 저조한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하며 이같이 말했다. 》

○ 저무는 ‘미국의 세기’


버락 오바마 대통령
버락 오바마 대통령
1991년 소련 붕괴 후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등극했던 미국의 리더십이 추락하고 있다. 세계의 단극 권력(Unipolar Power)으로 군림했던 미국의 대외적 슈퍼파워 위상 추락이 국내 정치의 리더십 부재와 맞물리면서 세계는 ‘리더리스(Leaderless)’ 사회가 되고 있다.

미국의 위상 추락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 신용등급을 최고등급인 AAA에서 한 단계 낮은 AA+로 끌어내린 지난해 8월 5일은 현대경제사(史)에서 ‘팍스 아메리카나’가 마침표를 찍은 날로 기록될지 모른다. 또 미국 칼리지보드 조사에 따르면 한때 최고 수준이던 미국의 대학교육은 현재 12위권으로 밀려났다.

미국의 군사 리더십이 위협받는 징후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1월 중국은 미 국방장관 방중에 맞춰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의 첫 시험비행에 나서며 군사력을 과시했다. 미국의 오랜 동맹국인 브라질과 터키는 지난해 8월 미국과 핵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는 이란과 핵연료 교환협정을 맺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월스트리트저널 기고에서 “과거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미국에 대한 군사안보적 도전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외교력도 도마에 올랐다. 아랍의 봄 시위 사태에서 미국이 독재 정권에 힘을 실어주면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지지하는 이중적 외교를 펼친다는 비난을 들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아랍권 변화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자인했을 정도로 정보력에 중대한 허점을 드러냈다. 민주화 혁명 이후 중동의 권력공백 상태에서 급진 이슬람주의 운동이 세를 확장하는 것도 미국에 중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

10년 전 미국이 슈퍼파워에서 밀려날 것으로 예견한 좌파성향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문제는 미국이 얼마나 다른 나라에 피해를 덜 주면서 ‘품격 있게(gracefully)’ 무너지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 ‘폴리스맨’에서 ‘갓파더’로 변신하는 미국


전문가들은 미국의 슈퍼파워 위상이 위협받게 된 결정적 계기로 9·11테러(2001년), 이라크전쟁(2003년), 금융위기(2008년) 등 3대 사건을 꼽는다. 모두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월터 로저스 전 CNN 애널리스트는 “미국 위상 몰락의 종착점은 도덕적 추락”이라고 분석했다. 정치 군사 경제적 영향력 쇠퇴뿐만 아니라 미국이 자부해온 도덕적 우월성까지 도전 받고 있는 것. 관타나모와 아부그라이브 수용소 고문, 월가 부패 스캔들이 그 배경이다.

그런 가운데 미국은 조심스레 리더십 역할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재정적자 등으로 내홍에 시달리지만 수단, 아이티 지진 구호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지역분쟁, 긴급사태, 테러, 자연재해에 신음하는 일반 주민을 지원하는 데 미국의 압도적인 리더 역할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뉴스위크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허시는 “미국의 역할이 ‘폴리스맨’에서 ‘갓파더(대부)’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이 부시 시대에 대한 반작용에 따라 고립주의로 회귀할 것이라던 일각의 우려와는 달리 미국의 외교정책은 각국의 세계화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간접 지원하는 글로벌 긴급대응(SWAT) 팀으로 진화하고 있다.

○ 미국 정치 시스템의 기능 정상화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회복하기 위한 관건은 국내 정치다. 뉴스위크 국제부문 편집장이자 저명 정치평론가인 파리드 자카리아에 따르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네 차례의 글로벌 리더십 위기를 맞았다. 1950년대 말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 1970년대 초 오일쇼크, 1980년대 중반 일본제품의 미국 공략, 그리고 지금이다.

미국이 예전의 위기를 잘 극복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고 자카리아 편집장은 분석했다. 국내 정치의 혼란과 뒤섞여 악순환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정치는 정책 도출을 위한 타협보다 극단적인 당파주의가 득세하는 구조다. 2000년대 중반 선거자금법 개혁 후 이익집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당파주의는 고착화됐다.

이익집단의 정치자금 후원을 받은 공화 민주 양당의 당파적 세력은 건강보험, 사회보장제도, 세제 개혁 등 주요 이슈 때마다 이념적 원칙을 고집하며 상대 진영과 사생결단식의 대결을 불사하고 있다. 타협의 리더십을 발휘하면 약한 정치인으로 각인되고 정치자금 모금에 불리하다는 인식이 정치인들 사이에 폭넓게 자리 잡았다.

취임 직후 62%를 기록했던 오바마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44%까지 떨어졌다. 주요 정책 입안 때마다 의회와 설전을 벌이면서 국가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통령에게 미국인들은 높은 점수를 주지 않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현직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대선 후보들과의 가상 대결에서 근소한 접전을 벌여 재선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의회 지지도도 11%까지 떨어지며 바닥권을 맴돌고 있다. 최근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6%는 현직 의원이 모두 재선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의회 불신이 깊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말 대선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미국의 슈퍼파워 위상이 변할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렵다. 경제 문제 등 국내 정치가 다급한 오바마 대통령은 외교정책 변화를 추구할 여유가 없고 공화당 후보들은 과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주창했던 ‘아메리칸 리더십’만 되풀이해 외치고 있다.

그럼에도 결국은 국내 정치의 리더십이 제대로 작동해야 글로벌 위상 변화에 대처할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새로운 리더십을 도모할지, 과거에 안주하며 파워의 몰락을 지켜봐야 할 것인지. 이제 선택은 미국의 손에 달렸다.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 포스트 아메리칸 시대 파워그룹은? ▼

美-中-러 3강 다극체제 구축…日-인도-브라질 입김 세질듯

“‘미국의 세기’가 지고 있다면 그 이후의 역학구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최근 국제정치학자들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하는 주제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독점적 권력을 행사해온 시대에서 다수의 국가가 헤게모니를 분점하는 다극(Multipolar) 체제의 시대로 옮겨갈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주요 2개국(G2)에 러시아를 포함한 G3 시대가 예고되기도 했다.

‘부시 이후의 미국과 세계’ 저자인 헬레나 커빈은 미-중-러 3강이 다극체제의 1선을 형성하고 2선에서 유럽, 일본, 인도, 브라질 등 준(準)4강이 각축을 벌일 것으로 전망했다.

파리드 자카리아 뉴스위크 국제부문 편집장은 “지난 500년 동안 세계는 거대한 권력 이동을 3번 겪었다”고 밝혔다. 16세기 서양의 부상, 19세기 미국의 부상, 21세기 나머지 국가들의 부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포스트-아메리칸’ 시대가 개막하는 지금 시점에는 다극체제 속에서 나머지 국가들이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포스트-아메리칸 시대에 미국은 어떤 모습을 할 것인가. 글로벌 유일 리더로서의 존재감은 줄어들겠지만 미국은 여전히 다른 나라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리비아 공격 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측면 지원했듯이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개입 수위를 낮췄지만 포기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또 적극 개입을 요구하는 국내 보수파의 압력도 높다.

미국이 리더 역할을 해주길 원하는 나라가 많다는 것도 변수 중 하나다. 존 아이켄베리 프린스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와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복지국가 체제와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대가로 자국의 군사적 파워를 포기하는 대신 미국과 동맹관계를 구축하고 의존해왔다”며 “다극체제 속에서도 이 같은 미국과 동맹국 간의 ‘그랜드바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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