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를 향한 분노, 美대륙도 뒤흔드나

■ 금융계 규탄 시위, 주요 도시로 확산 조짐

지난 주말 오후 미국 뉴욕 맨해튼에 진입하려는 차량은 평소보다 2, 3배 많은 시간을 도로에서 허비해야 했다. 금요일인 9월 30일에는 맨해튼 남쪽 월가 일대를 점령한 2000여 명의 가두시위로, 토요일인 1일에는 오후 5시부터 시위대가 점령한 브루클린 다리에 대한 경찰의 차단으로 진입로 곳곳이 막혔기 때문이다.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9월 17일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슬로건으로 시작된 월가 시위가 지난 주말 절정을 이루며 미국 주요 도시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러시아의 24시간 영어방송 채널인 RT는 1일 ‘중동의 봄’을 빗대어 이번 시위를 ‘미국의 봄’이라 명명했다.

○ 월가를 넘어 주요 도시로.

9월 30일 보스턴 도심 뱅크오브아메리카(BoA) 건물 앞 시위에는 3000여 명이 참가했다. 참가자 수로는 9월 17일 이후 가장 많고 뉴욕 월가가 아닌 다른 대도시에서 처음 시위가 열렸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보스턴 시위의 주체는 월가 시위대와는 다른 ‘라이트 투 더 시티(Right to the city)로 2007년 미 전역 20여 개 시민단체로 조직된 연합시민단체 모임이다. 이들은 금융권의 탐욕을 규탄하며 금융회사만 배불리고 서민들을 거리로 내모는 미국 자본주의 현실을 맹비난했다. 이들은 “다수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수백만 달러의 급여와 상여금을 긁어모으며 매달 수천 명의 직원을 해고하고 있다”면서 “계속 이대로 둘 수는 없다”고 밝혔다. 특히 대형 은행들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택담보대출을 갚지 못하는 대출자를 대상으로 주택 압류를 강화하면서 서민들의 궁핍해진 삶을 규탄했다. 이 시위에서 경찰은 모두 24명을 연행했다.

이번 미국 시위의 진원지인 뉴욕 맨해튼 남단 주코티 공원에서는 1일 오후 3시 반경부터 시위가 재개됐다. 시위대는 브루클린 다리 인도에 집결했다. 상당수가 인도를 벗어나 차도를 따라 다리를 건너려고 시도했다. 이를 불법 시위로 규정한 경찰이 진압과 해산에 나섰다. 브루클린 다리의 차량 통행은 연행 작전이 끝난 뒤인 오후 8시 5분에야 재개됐다. 경찰은 2일 오전 2시 현재 700여 명을 이곳에서 연행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1일 수백 명이 “기업이 아닌 사람을 위한 권리”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벌였다.

월가 시위의 상황과 향후 행동지침을 통보하는 웹 사이트인 ‘월가를 점령하라(www.occupywallstreet.org)’는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이미 ‘시카고를 점령하라(Occupy Chicago)’처럼 보스턴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등 주요 도시를 넣은 시위 예고문구가 홈페이지에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이 홈페이지에 따르면 6일 뉴욕뿐만 아니라 다른 대도시에도 월가와 비슷한 점거시위가 열릴 예정이다.

○ 주도세력 없지만 더 강해지는 결속력

치기 어린 젊은이들의 단순한 이벤트로 여겨졌던 월가 시위는 점차 미국 사회에 심상치 않은 파장을 던지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 히피족이 중심이 돼 전국으로 확산된 반전평화시위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번 시위는 뚜렷한 시위 주체가 없고 다양한 목소리가 혼재된 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첨단 정보기술(IT) 무기로 무장해 있다.

이번 시위의 발단은 캐나다였다. 반기업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캐나다 매거진 ‘애드버스터(Adbusters)’는 8월부터 블로그 등 SNS를 통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위에 왜 미국은 침묵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어 ’9월 17일 월가를 점령할 자 그 누구’라며 도발적인 게시물을 올렸다. 여기에 답한 단체는 스페인 마드리드 학생시위에 감동받았다는 ‘총회(General Assembly)’였다. 특이한 점은 이 단체를 이끄는 주도세력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기자가 웹 사이트 운영자에게 집행부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e메일을 보냈지만 답은 “우리는 우리일 뿐(We are just us)”이었다.

주코티 공원의 시위대는 프레스센터, 식사 공간 등을 체계적으로 나눠 점차 장기농성에 대비하고 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맨해튼 풀턴가의 UPS 점포로 이들을 후원하는 각종 물품이 배달되고 있다. 매일 오후 2차례씩 ‘일반 총회’가 열린다. 즉석 사회자가 나서고 할 말이 있는 사람은 ‘마이크 체크’라고 외친 뒤 일어나 자유롭게 의견을 밝힌다.

시위 참가자 중에는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로 부르는 사람도 있고 결혼식 후 기억나는 피로연을 갖기 위해 찾은 신혼부부도 있다. 연령층도 20대에서 40대까지로 점차 확대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누적된 미국의 빈부격차와 고실업을 시위의 근본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듣는 목소리는 이보다 훨씬 다양하다. 아프가니스탄 참전 반대부터 시작해서 인종차별주의, 무정부주의 등 스펙트럼이 꽤 넓다.

뉴욕=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