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 위기 그리스를 가다]본보 이종훈 특파원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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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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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돈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국회앞 시위대 현수막엔 절망만…

이종훈 특파원
이종훈 특파원
광장 곳곳에서는 뜨거운 햇볕만큼이나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국제사회에 손을 벌린 지 불과 1년 만에 또다시 경제위기를 맞은 풍전등화의 그리스가 가야 할 방향이 격론의 주제다.

고대 문명과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이 나라 정치는 리더십을 잃은 채 갈팡질팡하고 있고 국민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할 만큼 격분해 있다.

18일 그리스 아테네의 심장인 신타그마 광장(헌법광장). 분노한 민심의 용광로가 끓어오르고 있음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광장 한복판에는 100여 개의 텐트와 수십 개의 대형 천막이 쳐져 있다. “삶도, 돈도, 아무것도 없다” “무관심은 끝, 이제 우리가 직접 민주주의를 하자” “국회는 없애버리고 그리스 국민을 하나로 묶자”는 대형 현수막들이 파도처럼 물결친다. 흡사 4개월 전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30년 독재를 끝낸 카이로의 성지 타흐리르 광장의 복사판처럼 느껴질 정도다. 광장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국회의사당은 무장한 경찰과 군인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다.

벌써 2주일 넘게 광장 텐트촌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실업자 베니로스 씨는 코앞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리스는 너무 오래 썩었다. 부정과 부패를 주도해온 지금의 정치인과 은행가들은 모두 없어지고 완전히 새로운 정치세력이 들어서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다. 때마침 의사당 옆 대학로 거리에서는 약 6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규모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대열 속 마티 씨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똑같다. 이제 그들의 손에 우리의 미래를 맡겨 둘 수 없다”고 분노했다.

사회당 출신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가 17일 대폭 개각을 단행했지만 민심은 차갑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정적을 재무장관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생명을 조금 더 연장해 보려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매일 저녁이면 실업자들은 물론이고 직장인들까지 신타그마 광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들은 부패한 정치인과 공무원이 주도하는 긴축정책 때문에 먹고사는 게 너무 어려워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이 떠안았다는 심리가 팽배했다.
▼ 정치권, 표 때문에 긴축 ‘눈치’… 국민은 “내 월급 못깎는다” ▼

18일 오후 그리스 아테네 국회의사당 앞에서 정부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 약 6000명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아테네=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18일 오후 그리스 아테네 국회의사당 앞에서 정부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 약 6000명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아테네=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실제로 지난해부터 정부의 긴축정책에 따라 법인세는 거의 2배, 부가가치세는 19%에서 23%까지 높아지고 공공요금이 덩달아 오르면서 물가가 급등했다. 분야별 구조조정이 단행되면서 실업자가 급증하는 반면 투자가 중단됨에 따라 2009년부터 마이너스 성장을 보인 경제가 불황의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렌터카 업체들과 보험 등 자동차 관련 업체가 대거 몰려 있는 싱그루 거리는 상황이 더 심하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이곳은 페인트 낙서로 가득 찬 썰렁한 빈 점포가 즐비하다.

거리 곳곳에는 약 20개의 점포가 ‘ENOIKIAZETAI(임대 중)’라는 안내문만 붙여 놓고 문을 닫고 있었다. 인근 주유소 직원은 “매출이 줄어 작년 하반기부터 문을 닫는 점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올 들어 우후죽순처럼 문을 닫고 있다”며 “새로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전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당 정부의 추가 긴축안이 제대로 실행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아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5차분(120억 유로) 지원이 내달 초 계획대로 이뤄진다 해도 발등의 불만 끄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 정치 포퓰리즘과 무너진 재정


그리스의 ‘날개 없는 추락’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몰아친 2009년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그리스 경제는 2009년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뒤 2010년에는 ―4.4%, 올해 1분기는 ―5.5% 성장에 허덕이고 있다. EU는 그리스의 올해 성장률이 ―4% 안팎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업률은 2009년 4분기부터 10%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올 1분기에는 15.9%까지 치솟았다. 올해 경제성장률도 ―3.7%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난해 EU와 IMF에서 1100억 유로를 빌려왔지만 순식간에 돈이 바닥나고 다시 손을 내밀게 된 데 대해 정치인들의 무책임에서 농축된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짧은 시간에 치유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중론이다.

실제로 2008년 위기 이후 온 나라가 빚더미에 짓눌렸는데도 사회복지 지출은 급증했다. 정부 예산에서 사회복지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25.7%에서 2010년 36.3%로 더 늘었다. 그리스 언론은 “국고로 충당하던 연금 기금의 재원이 바닥나자 구제금융으로 연금을 지급하고 밀렸던 임금을 해결하는 데 상당한 돈을 써버렸다”고 지적했다.

벨기에 자유대학 앙드레 사피르 교수는 “그리스는 정치권이 수십 년간 나라를 잘못 운영해 왔다”면서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행정부를 개혁하고 국가 운영 모델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경제 전문가들은 “사회당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이 미흡했기 때문에 위기 재발은 예견된 측면이 크다. 특히 공기업 민영화와 공공자산 구조조정 정책이 부족하다”면서 “또 제조업의 기술 수준이 낮고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투자가 적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부는 뒤늦게 재정 건전화를 위해 민간 부문의 보너스 강제 삭감을 포함해 2015년까지 공공 분야 일자리 15만 개를 없애고 4년간 복지비용 40억 유로를 줄이는 동시에 유류세와 부가세를 높이는 내용의 추가 긴축안을 올 4월 의회에 제출했다. 280억 유로의 재정적자를 축소하고 500억 유로 규모의 국유자산을 민영화하는 프로그램이다. 통신회사 OTE, 국영은행인 포스트뱅크 등 공기업의 정부 지분을 즉각 팔고 공공 부문의 지출을 삭감하는 조치 등을 통해 올해 재정적자를 GDP 대비 7.5%로 낮춰 내년에는 당초 목표한 GDP 대비 3% 이하로 끌어내리겠다는 계획이지만 여론의 반대와 정치권의 눈치 보기로 거의 실현 불가능한 상황이다.

국제금융센터는 17일 보고서에서 “그리스 재정의 지불능력 제고는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며 “만약 추가 구제금융 이후에도 국채시장의 여건 개선이 가시화하지 않으면 결국 강력한 채무조정 시나리오가 고려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나라 거덜낸 정치인들 물러나야… 포퓰리즘 견제못한 국민도 책임” ▼
시민연합 ‘신타그마 비상총회’ 쇼티리스 공동 대변인


“나랏돈을 거덜 낸 썩은 정치인과 은행가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

그리스 정부의 긴축안에 반대하는 시민연합체인 ‘신타그마 비상총회’의 아티 쇼티리스 공동대변인(사진)은 1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여야의 현 정치인들은 더 이상 고통에 빠진 그리스 국민을 대변하지 못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신타그마 총회는 미디어, 기술, 봉사, 의료, 직능별 대표들로 각각 구성된 27개 조직으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기자 출신 실직자라는 쇼티리스 대변인은 “우리는 그리스 정치를 미워하지 않는다. 정치인과 정당을 미워하는 것”이라며 “그들은 오랫동안 국민을 속여 왔고 이제 국민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파국에는 정치인뿐 아니라 공무원과 노조, 더 나아가 국민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리스는 공공 부문이 국가 경제 규모의 40%, 생산연령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1974년 군사정권이 끝난 이래 36년 중 22년을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공공 부문은 확장일로를 걸어왔다.

재정적자가 147억 유로로 GDP 대비 12.7%(2009년)까지 오르자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는 2010년 1월 처음으로 긴축 예산 계획을 발표했으나 이에 반대하며 제일 먼저 총파업(2010년 2월 10일)으로 맞선 곳이 공무원노조였다. 이어 두 차례의 국민 총파업이 잇따랐다. 국민은 임금 인상과 복지 확대를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한 사회당이 거짓말을 했다고 반발했다. 올 들어서도 5월에 이어 6월 15일 두 번째 총파업을 한 노동계는 추가 긴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또다시 48시간 총파업을 하겠다고 예고했다.

쇼티리스 대변인은 “국민의 책임은 없느냐”는 질문에 “정치인을 잘못 뽑고 잘못된 상황을 오래도록 방관한 책임은 있다”면서 “하지만 국민은 국가 경영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다른 시민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신타그마 광장에서 만난 전직 교사 출신 디아만톨리스 씨는 “경제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표를 얻기 위해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했던 사회당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리스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몰타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가 그리스 구제금융에 돈을 낸 사실을 아느냐”고 기자가 묻자 “정치인과 은행이 돈을 전부 가져갔다. 국민은 잘못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7일 아테네 동쪽 세올로구 거리에서 만난 마티 씨의 생각도 비슷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아테네 대학에서 6년째 학부 과정을 밟고 있다는 그는 “임금 삭감은 절대 안 된다. 정치인과 은행가, 사업가들이 저지른 잘못을 왜 우리가 뒤집어써야 하느냐”며 “정치인과 은행가들이 세비나 연봉을 삭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 교민 이모 씨는 “올 초 그리스 TV에서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국민이 나서 금 모으기를 해 위기 극복에 일조했다는 방송을 한 적이 있었는데 주변에서는 ‘국민 잘못이 없는데 왜 그래야 하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어서 놀랐다”고 전했다.

현재 그리스에는 정치인, 경제인, 일반 국민 누구도 책임지거나 고통을 분담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의 미래가 어둡게 느껴지는 이유다.

아테네=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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