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낮 12시 이집트 수도 카이로 중심가의 타흐리르(해방) 광장에 순식간에 모여든 1만여 시위대에서 거친 구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광장에 이미 들어와 있던 군과는 충돌하지 않은 채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기자에게 다가온 무스타파 씨(50)는 “무바라크의 시대는 갔다. 너무 오래 참고 살았다”고 격분했다.
○…경찰이 거리에서 사라진 혼란을 틈타 약탈과 방화가 곳곳에서 자행되자 군이 카이로 등 전국 주요 도시에 배치됐다. 정부청사와 박물관 그리고 주요 문화재를 소장한 저택 앞에는 군 탱크와 장갑차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하지만 세계 4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카이로 중앙박물관은 27일 폭도에게 습격당했고 일부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도난당했다. 이 과정에서 미라 2구가 파괴됐다. 시위대는 박물관을 지키기 위한 인간 띠를 만들기도 했다. 군 당국은 이집트 최고의 관광 자원인 피라미드에 대해서도 출입을 금지했다.
군 투입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흉기로 무장한 약탈자들이 슈퍼마켓과 쇼핑몰에서 상품을 훔치고 부유한 주택가를 공격해 돈을 빼앗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31일 새벽 카이로 번화가 무한데심에서는 괴한들이 고급 면세점 건물을 털고 불을 지른 뒤 도망갔다. 29일 밤과 30일 새벽에는 교도소 4곳에 수감된 죄수 수천 명이 집단 탈옥했다. ‘이슬람 전사’들을 수용하고 있는 한 교도소에서는 무장세력이 경비대와 수시간 동안 교전을 벌여 죄수들의 탈옥을 도왔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주민들은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집 입구를 판자로 막는 등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마을 청년들은 스스로 칼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해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약탈에 대비하고 있다. 한 육군 장성은 TV 생중계를 통해 약탈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필요한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집트에는 오후 4시∼오전 8시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있다.
이집트 정부는 반정부 시위를 적극적으로 보도한 위성방송 알자지라 지국에 대한 면허를 30일 취소시켰다. 이에 따라 알자지라의 아랍어 방송이 이날 오후부터 중단됐다. 알자지라는 “지국 폐쇄 조치는 이집트 국민들의 목소리를 검열하고 잠재우려는 시도”라고 비난했다.
○…군이 28일 오후부터 투입됐지만 30일 오후 현재까지 군과 시위대 사이에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시위대들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자신들을 강경 진압했던 경찰과는 달리 질서유지 임무에 주력하는 군에 대해선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대는 28일에만 카이로 내 경찰서 17곳을 불태우는 등 경찰에는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군인들이 시위대를 돕는 모습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시위대가 경찰이 지키는 내무부 청사에 몰려갔을 때 군 장갑차 4대가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경찰과 맞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 한 병사는 장갑차 앞에서 손가락으로 V자 모양을 만들며 시민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한 육군 대위는 시위대에 가담해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무바라크의 사진을 찢었다고 AP는 전했다.
○…카이로 국제공항에서는 이집트를 빠져나가기 위한 ‘엑소더스’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부유층과 기업인을 태운 민간 항공기 19대가 29일 카이로를 떠나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등으로 떠났다.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중에는 이집트 통신업계 거물인 나기브 사위리스 오라스콤 회장과 호텔 재벌인 후세인 살렘 일가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통행금지령 발령에 따라 항공편이 무더기로 취소되거나 지연되면서 비행기를 타지 못한 여행객 수천 명이 공항에서 발이 묶였다. 이집트 국적 항공은 이날 15편을 취소했다. 엑소더스 물결로 공항 주변 도로는 극심한 정체를 빚었다. 인터넷 차단으로 항공기 일정을 확인할 수 없게 된 여행객들이 공항으로 몰려들면서 여객터미널 내부 역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전 세계 주요 여행사들이 이집트 관련 예약을 취소하거나 다른 국가로 일정을 변경하도록 유도함에 따라 이집트의 주요 외화벌이인 관광산업(연간 108억 달러 수입 규모)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각국 정부는 30일 이집트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철수시키거나 이집트 여행 자제를 촉구하는 등 자국민 보호조치에 착수했다. 이집트 주재 미국 대사관은 30일 성명을 통해 “이집트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미국인을 위해 국무부 차원에서 항공편을 제공할 것”이라며 자국민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이집트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영국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아랍에미리트 요르단 등도 자국민의 ‘출애굽’을 도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