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反美성향 엘바라데이가 시위주도 당혹

  • 동아일보

■ 오바마의 이집트 딜레마

이집트 시위 사태가 격화됨에 따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중동정책이 어려운 시험대에 올랐다.

○ 장기적 명분과 단기적 실리 사이

이집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중동정책 판짜기의 기본 틀이었다. 30년째 이집트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미국 중동정책의 가장 확고한 버팀목으로 미국의 맹방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보장자’ 역할을 해왔다. 이집트는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통로를 움켜쥐고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도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다음으로 가장 많은 15억 달러를 매년 군사지원비 명목으로 이집트에 지원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 6월 무슬림과의 화해 선언을 한 곳도 카이로였다.

미국은 장기적인 명분과 단기적인 실리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다. 역사의 정의는 민주주의의 수호와 확산 쪽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2008년 6월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이 천명했듯이 ‘장기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제3세계에서) 민주주의의 확산이 미국의 국익’이라는 게 미국인들의 신념이다. 특히 중동지역에서 자국 내의 독재와 부패에 절망한 청년들이 그 증오심을 반미로 표출하며 알카에다 같은 테러조직에 가입하는 현실을 자각하면서 9·11테러 이후 미국 내에선 아무리 친미 성향이라 해도 독재정권에는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왔다.

하지만 당장 이집트가 혼란에 빠져 반미 성향의 개혁정권이 등장할 경우 모처럼 잡은 중동 평화협상의 기회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미국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 껄끄러운 반미 성향 엘바라데이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인물이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란 점도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는 IAEA 사무총장 재직 시절(1997∼2009년) 반골 기질로 미국과 갈등을 빚은 바 있다. 1964년부터 제네바와 뉴욕 등에서 근무한 정통 외교관 출신인 그는 미국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의혹을 제기했을 때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고, 이라크전쟁을 “무력의 사용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가중시키는 두드러진 사례”라고 비판했다. 미국은 그의 연임을 저지하기 위해 외교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2005년에는 원자력 에너지가 평화적으로 이용되는 데 이바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으로 더 알려지게 됐고 2009년 말 이집트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순식간에 야권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 중립에서 시위대 쪽으로 선회

이집트 시위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24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이집트 상황은 안정적”이라며 ‘조심스러운 관망세’를 취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시위 이틀째인 26일 “이집트 정부는 국민의 열망에 부응할 것을 촉구한다”며 시위대를 응원하고 나섰고, 27일엔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섰다.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도 27일 “백악관은 계속해서 무바라크 대통령이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도록 압박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은 이날 “무바라크 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니며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말해 행정부 내의 다양한 시각을 드러냈다.

미국 언론들은 절대적 중립에서 시위대 쪽으로 무게중심이 살짝 옮아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미국 외교협회(CFR)의 레슬리 겔브 명예회장은 “백악관은 ‘어느 쪽도 편들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동안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 왔던 무바라크 정부에 대한 방향 수정”이라고 말했다. 물론 아직 미 행정부의 태도 변화는 정치개혁을 촉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양면적(투트랙) 접근 방식의 범주에 머물고 있다.

결국 상황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을 경우 미국의 최종 선택이 어느 쪽이 될지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유혈진압 국면에 접어들거나 무바라크 정부가 붕괴 위기에 몰릴 경우 미국의 계산은 더욱 복잡해진다.

“민주주의 확산이 미국을 더욱 안전하게 만든다”는 이상론과 “중동평화에 근접한 것은 민주정권이 아니라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이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같은 힘 있는 전제정권이었다”(미국안보센터 로버트 캐플런 연구원)는 ‘현실정치’론 사이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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