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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9월 5일 02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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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간 주 유티카 시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만난 티머시 댄조크 씨(44)의 첫인상은 딱딱해 보였다. “2년 전 집에 도둑이 든 뒤부터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약간 부담스러워서…”라고 했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그는 돈을 굴릴 때도 채권형 펀드나 예금 같은 안전한 자산만을 선호해 왔다. 이런 보수적인 투자성향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더 뚜렷해졌다. 지금 그가 가진 금융자산은 예금계좌 2개와 퇴직연금이 전부다. 댄조크 씨는 “은행들의 행태를 보니 위험을 감수하는 ‘공격적 투자’라는 걸 하고픈 마음이 싹 사라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 인도 등지에서는 ‘위기가 곧 기회’라며 다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상당수다. 금융회사 자금의 원류(源流)인 전 세계 중산층이 이처럼 투자패턴을 바꾸면서 글로벌 자금 흐름도 큰 변화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대학총장을 지내고 은퇴한 브라질의 오로라 카타리아 알바네제 씨(83·여)는 최근 펀드를 모두 환매했다. 한 달에 3000헤알(약 200만 원)씩 받는 연금을 조금씩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금 사는 큰 집을 팔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할 계획이다. 퇴직연금으로 생활비를 쓰고 손자 용돈까지 주고 나면 늘 적자여서 관리비라도 줄이려는 것이다. 바닷가의 작은 별장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여유가 없어졌지만 은행에 돈을 맡기거나 주식에 투자할 생각은 없다. 펀드 투자로 노후를 편히 보내려던 기대가 깨지면서 은행에 대한 불신이 커져서다.
브라질에선 많은 고령자가 알바네제 씨처럼 불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퇴직연금 수령액이 적은 데다 일부는 투자로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알바네제 씨는 “노인들은 경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은행에서 하라는 대로 투자했는데 막상 위기가 닥치자 은행은 전혀 도와주지 않고 ‘나 몰라라’ 했다”고 성토했다.
고(高)수익률로 포장된 금융상품에 대한 불신이 커진 데 비례해 대표적 안전자산인 채권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셰러턴크리크 호텔에서 마케팅 담당 이사로 있는 딕샤 트리베디 씨(31)는 올 들어 투자 자금의 대부분을 채권에 몰아넣었다. “주식 투자는 수익률은 높지만 겁나서 못해요.” 인도 출신인 그는 보너스를 받거나 채권 투자에서 생긴 돈은 8%의 연간 이자를 주는 인도 현지 은행의 정기예금에 넣고 있다.
○ 투자방향 180도 바꾼 사람들
투자에 실패한 사람 중 일부는 투자 대상을 바꾸기도 한다. 브라질에 있는 외국계 은행 지점장인 발디네이 알베르토 씨(39)는 보유주식을 대거 처분한 자금으로 부동산에 투자했다. 주식 투자로 손실률이 최고 30%까지 치솟자 집을 사서 월세를 받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너무 위험한 결정이라고 만류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부동산 매입 덕분에 주식 투자 손실을 메울 수 있었다. 브라질 정부가 기준금리를 낮추면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사려는 수요가 늘어 전반적으로 집값이 올랐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씨와 달리 부동산 투자에서 주식 투자로 선회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기업 실적이 개선될 조짐을 보이자 저평가된 주식을 찾아 집값 하락으로 생긴 손실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투자자들이다.
두바이에서 디지털마케팅 회사 ‘플립’을 경영하는 요세프 투칸 씨(34)는 지난해 친구 2명과 함께 5만 달러씩 투자해 에미리츠타워 근처에 15만 달러짜리 아파트를 샀다가 4만5000달러나 손해를 봤다. “집값이 50∼60%씩 뛰던 작년 여름까지 두바이에는 집을 사서 단기간에 되팔아 수익을 올리는 투자 패턴이 유행했는데 뒤늦게 유행을 따르다 그만….”
말끝을 흐리던 그는 “여유자금이 생기면 주식에 투자할 생각”이라며 “지금처럼 저평가된 기업이 많을 때가 투자를 시작하기 적당한 시점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신흥국에서 부동산 투자가 활기를 보이는 것과 달리 미국 등 버블 붕괴의 진원지는 여전히 냉기만 흐른다.
미국 뉴욕의 부동산회사인 ‘아메리칸이글’의 사이몬 엘리아카임 부사장(65)은 본업인 부동산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값은 많이 빠졌는데 거래가 없어요. 오늘도 실적이 없는 직원 4명을 해고해야 했어요.”
엘리아카임 부사장은 요즘 정상적인 거래 대신 은행에 압류되기 직전인 주택을 중개하는 쇼트세일(Short Sale) 거래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거래를 통해 은행은 부실채권을 빨리 털 수 있고 채무자는 집을 포기하는 대신 나머지 채무를 탕감받을 수 있다. 대표적인 ‘불황형 거래’인 셈이다. 아메리칸이글이 올해 거래한 쇼트세일은 30건으로 작년보다 90%나 늘었다.
○ 신흥대국 국민은 공격적 투자
중국 푸젠(福建) 성 샤먼(廈門) 시에서 은행 부지점장으로 있는 정쉬(鄭旭·39) 씨는 요즘 ‘밀짚모자는 겨울에 사라’(남들의 관심이 덜할 때 저평가된 주식에 투자하라는 뜻)는 증시 격언에 공감하고 있다. 올해 2, 3월 주식과 부동산 시장이 ‘바닥’이라고 판단해 갖고 있던 집 2채를 팔고 가격이 싼 다른 지역에 집을 3채 샀는데 40%가 넘는 수익률을 올릴 정도로 대박을 터뜨렸다. 인도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마나사 모한티 씨(36·사회개발 컨설턴트)도 정 씨처럼 위기를 기회로 보고 공격적 투자에 나섰다. 그는 최근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52렉 루피(약 1억3000만 원)짜리 집을 샀다. 원래 60렉 루피였던 집값이 많이 떨어져 투자 매력도가 높아졌다고 본 것이다. 모한티 씨는 “작년 은행 대출이자가 연 9%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8% 정도니까 이자 부담도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위기가 기회’라는 인식이 부각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투자라는 걸 해본 적 없는 사람들까지 투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수도전력청에서 근무하는 모하메드 에갈리 씨(29)는 올해 2월 난생처음 시작한 주식 투자에서 수십 %의 수익률을 올렸다.
“제 선택이 옳았어요. 당분간은 계속 주식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세계 경제가 완전 회복되기 전까지는 주가가 오르지 않을까요?” 주가 상승을 확신하는 새내기 투자자의 표정에선 경제위기에 대한 두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덜 입고… 덜 먹고… 가계부와 전쟁중▼
경제위기 이후 지구촌 중산층들은 지출을 줄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사는 엘쥐비에타 파스테르나크 씨(40·여)는 요즘 남편의 머리를 직접 다듬는다. 남편은 한 달에 한 번 커트를 해야 하는데 커트비가 50즈워티(약 2만2000원)나 되기 때문이다. 파스테르나크 씨는 1년에 한 번 미용실에서 커트를 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리카르 루비오 씨(38)는 7개월 전부터 도시락을 싸서 갖고 다닌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려면 10∼15유로, 샌드위치를 먹어도 5유로나 들어요. 어쩔 수 없이 외식을 해야 할 때를 빼고는 점심은 도시락, 저녁은 집에서 아내와 먹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최근 도시락가방 매출이 급증했다. 메뉴를 간편화하고 가격을 내린 ‘금융위기 메뉴’를 선보인 레스토랑과 바가 늘어났지만 한 번 닫힌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 사람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자 TV 시청시간도 덩달아 늘었다. 지난해 1인당 하루 평균 230분이던 스페인의 TV 시청시간은 올해 1∼7월 235분으로 늘었다.
호텔 마케팅책임자인 폴란드인 카타쥐나 니에즈고다 씨(41·여)는 올해 휴가 때 가족과 함께 친지가 살고 있는 시골에 다녀왔다. 작년에는 이탈리아와 이집트를 여행하는 등 매년 휴가 때마다 해외로 나간 그였다.
특별취재팀
△ 팀장=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
△ 미국 미시간·뉴욕=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 일본 도쿄=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 중국 상하이·우한=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 인도 뉴델리=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 영국 런던·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 독일 프랑크푸르트·네덜란드 암스테르담=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스페인 마드리드·바르셀로나=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 헝가리 부다페스트·폴란드 바르샤바=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아부다비=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 브라질 상파울루=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 허리띠 졸라 맨 지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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