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피해의식 벗고 IT시대 유목민 정신 재발견해야”

  • 입력 2009년 1월 25일 18시 06분


만주원류고를 감수한 파워북 홍순만 기획위원
만주원류고를 감수한 파워북 홍순만 기획위원
'흠정만주원류고' 감수한 홍순만 씨-"IT시대 유목민의 정신을 발견해야"

만주원류고를 번역한 한학자 장진근 씨는 검찰공무원 출신으로 퇴직 이후 본격적으로 번역 작업을 시작한 '재야'파다.

감수에 참여한 파워북 기획위원 홍순만 씨의 이력 또한 이에 못지않게 흥미롭다. 역사학도가 아니라 공대 출신으로 평생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 출신인 그의 최종 이력은 얼마 전 SK텔레콤에 합병된 하나로텔레콤 부사장. 평생 취미가 한국의 고대사였다지만 IT전문가 출신이 어떻게 이 책의 번역에 관여하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 어떻게 번역작업에 관여하게 됐나?

"현직에서 물러나자 갑자기 시간이 많았다(웃음). 출판사 일을 잠시 도우며 초고를 보게 됐는데 그 순간 '필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사서 번역은 한문뿐 아니라 중국어에 밝아야 가능하다. 중국어는 부족했지만 한문에 능통한 장 선생이 1차 번역하면 내가 원문을 다시 보고 어색한 부분을 집어가며 다시 교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주가 많은 책이기 때문에 나보다 1차 번역자인 장 선생의 고생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 단재 신채호 선생 이후 이 책의 존재는 한국 역사학계에 널리 알려졌는데 왜 번역조차 안 되고 오늘에 이르렀을까?

"무엇보다 우리 사학계의 뿌리 깊은 피해의식이 작동했다고 생각한다. 청나라의 위세에 위협을 느낀 조선 지식인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후반에 정약용 선생이 '아방강역고'를 쓰면서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로 수렴해 정리해버렸다. 당시 조선의 소중화주의자들이 느꼈던 지적(知的)인 위기감은 일제시대를 거쳐 탄생한 우리 강단사학자들의 심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토를 보전하기 위한 방어적 역사관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 민족을 보존하고 한반도 강역을 지키기 위한 우리 사학계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우리의 찬란한 북방 유목민의 역사를 잃고 말았다."

-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폄하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여진족의 과대평가된 역사라는 건데…

"그렇게 볼 수 없다. 그렇게 말한다면 학계의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전통 사서가 아니라 연구서(考)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적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이 책은 북방 유목민의 관점에서 만주 쪽을 조망해 기존 사료를 비판한 유일한 책이므로 사료적 가치보다 사관적 가치가 훨씬 더 높다. 그리고 여진을 미화했다고 본다면 명나라나 송나라 한나라 역사서는 자기 역사를 미화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나? 역사란 누구나 자기 관점에서 서술하는 법이다."

- 이 책이 주는 충격은 다름 아닌 목차에 있다. 여진족이 발해의 구성원인 말갈족의 후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의 원류에 부여 백제 신라를 포함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유목민의 사고는 열려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청나라는 길림, 즉 완안부에서 출발했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생각한 이동의 영토는 열린 공간이었다. 이 길림이라는 공간에 영향을 미친 국가를 다 모았다고 보면 된다. 백제와 신라도 만주와 관련이 없을 수 없다. 우리가 피해의식에 젖어 한반도에 국한해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데 유목민의 이주는 아주 자연스럽게 북백두대간을 타고 남백두대간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 그렇다면 삼한(三韓)이 왜 반도태생이 아닌 길림(만주)에 영향을 끼쳤다고 봤을까?

"어떻게 갑자기 한반도에서 마한 진한 변한이 튀어나올 수가 있겠나? 그게 더 어색한 생각이라고 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삼한정류고에 썼듯이 예전 숙신족(주신족)은 북백두대간에 웅거하면서 세 개의 조선으로 나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세 개의 조선이 어느 날 중국 정세의 변화에 따라 마치 게르만 민족의 이동처럼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나?"

-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가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얘기다. 이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라는 뜻이라는 일부 재야학자들의 해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 하나?

"단순하게 해석하면 '금씨의 족속'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애신각라'라는 성을 처음 부여받은 사람은 후금의 누르하치다. 그 먼 조상은 바로 금나라의 포고리옹순인데 설화에 따르면 선녀가 붉은 과일(감)을 먹고 그를 잉태했다고 나온다. 이는 동일하게 반복되는 북방 유목민족의 설화이자 신라 시조들의 설화와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이미 금나라 역사서는 포고리옹순의 뿌리가 신라에 닿아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건 터무니없는 얘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뿌리에 관한 얘기다. 세계를 정복한 여진족이 뭐가 아쉬워서 없는 사실을 꾸며 자신들의 역사서에 신라가 뿌리라고 적겠나? 게다가 이것이 실증사학으로 입증될 얘기도 아니다. 그 당시 이동경로로 따지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본다."

- 신라는 시작과 끝이 비교적 명확한 국가인데 만주연고권이 있다니 좀 어색한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사관은 19세기부터 20세기에 정착된 근대 민족주의적 역사관이다. 한반도 동해안에서 청진을 거쳐 백두대간 오른편 용정과 길림을 가는 것은 매우 뿌리가 깊은 이동로다. 이미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 서희와 길상이가 그 길을 통해 길림에서 진주까지 이동하는 게 나온다. 유목민의 이동은 만주 차원이 아니라 바이칼 호수를 거쳐 중앙아시아까지 가로지르는 스케일이다."

- 이 때문에 일부 독자들은 '만주원류고'가 청나라가 동북아시아를 차지하기 위한 원조 동북공정이라는 표현까지 한다.

"참 속이 좁다고 말해주고 싶다. 정말 매사에 피해의식이니 답답할 따름이다."

- 그럼에도 2000년 가까이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 몽골 여진과 조선은 다른 국가를 세워 치열하게 싸웠다. 때문에 이를 같은 민족이라고 묶는 것은 어색하다.

"물론 국가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나라들이다. 언어와 문화도 일부 다르다. 하지만 선조들이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고 우리의 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나? 유럽의 게르만 민족을 봐라.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수많은 부족들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원래 옆에 있는 부족과는 더 치열하게 싸우는 법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그들은 게르만 민족이고 민족적 동질감을 느낀다. 수많은 바이킹 부족들도 그냥 노르만족일 뿐이다. 분명히 거란과 몽골 여진족이 우리 민족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죽일 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와중에 이동하고 서로 교류를 한 셈이다.

21세기는 IT의 시대다. 영토의 개념이 희박해 지고 민족국가의 개념 또한 환골탈태해야 할 것이다.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일 수 있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유목민의 열린 시각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 된다. 중국은 겨우 동북공정이나 하면서 올드 패러다임인 영토적 야욕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그럼에도 우리가 부정한 청의 역사를 중국은 포용했다). 우리도 과감하게 유목민의 역사적 영토, 문화적 영토, 정신적 영토에 대한 재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 몽골이나 여진은 전 세계를 정복했던 나라인데 결국은 중화됐고, 우리는 살아남았다.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전 세계사가 유목민(씨줄)과 정착민(날줄)이 만들어온 인간 생활의 피륙이라고 본다. 기존 정착민이 만들어 온 국가의 토대를 갑자기 유목민이 뒤섞고 교류시켜 버리는 방식이다. 중국의 3대 발명품(제지술 화약술 나침판)이 몽골족의 원나라 시대에 무역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건너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21세기는 다시 찾아온 유목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민족이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반도에 국한됐던 우리 역사관을 빨리 탈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환빠(환단고기 마니아· 중국 대륙의 역사가 우리 민족에 의해 이뤄졌다는 주장)'가 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개방적 사관으로 다시금 세계무대로 자신 있게 나아가자는 얘기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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