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시름만큼 길어지는 2개의 줄

  • 입력 2009년 1월 6일 03시 00분


줄을 잘 서기로 유명한 일본인이지만 올해 벽두에는 특히 두 곳의 줄서기가 불황 세태를 반영했다.

하나는 연초 유명백화점 각 매장은 물론 동네 슈퍼까지 발매하는 후쿠부쿠로(福袋·복주머니)를 사려는 줄. 내용물을 알 수는 없지만 정가의 두세 배는 되는 물건들이 아기자기하게 들어 있어 열어보는 즐거움이 크다.

복주머니 내용이 알차기로 유명한 일부 백화점 앞에서 수천 명이 개장 30여 시간 전부터 밤새워 줄을 서는 풍경은 예년과 다름없었다. 다만 그 줄에는 하룻밤 1만 엔을 받고 대신 줄을 서주는 실업자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복주머니의 내용물도 상당히 달라졌다. 버블 경제기에는 르누아르나 피카소의 명화가 5억 엔의 가격에 복주머니에 담겨 팔릴 정도로 호사스러웠지만, 올해는 식품이나 양말, 속옷, 할인화장품 등 일용품 매장에만 인파가 몰려 일본인들의 실용주의 지향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1000여 종의 복주머니를 준비한 도쿄(東京) 이케부쿠로(池袋) 세이부(西武) 백화점 본점에서 예상 밖으로 인기를 끈 것은 ‘야채 자유쇼핑 복주머니’. 2009엔을 받고 10kg이 들어가는 장바구니에 당근 감자 등을 마음껏 우겨넣게 하고 멜론을 하나 얹어주자 판매 첫날 오전에 동나 버렸다.

다이마루(大丸) 도쿄점에서는 통조림이나 과자를 채워 넣은 1000엔짜리 복주머니 1000개가 1시간 만에 매진됐다. 니혼바시(日本橋) 미쓰코시(三越)백화점에서는 에너지 절약형 신축주택을 시중보다 20∼30% 싼 가격에 내놓아 6채를 팔았다.

비슷한 시간, 도쿄 도심 한복판인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는 또 다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직장에서 해고되고 사원 숙사에서도 쫓겨난 파견근로자들의 새해맞이를 돕기 위해 마련된 텐트촌의 급식을 기다리는 줄이다. 지난해 12월 31일부터 이곳에서 15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근로자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주자 갈수록 참가자가 불어나 4일에는 500명에 이르렀다. 신년 벽두 일본 미디어는 날마다 이들의 모습을 생중계했다.

주최 측은 5일 텐트촌이 해산한 뒤에도 이들을 지원해줄 것을 행정당국에 요청해 도쿄도가 4개의 폐교에 이들의 임시 잠자리를 마련해주기로 했다는 소식도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올봄까지 8만5000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추정돼 이런 지원이 크게 부족할 것으로 보인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