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부시

  • 입력 2008년 10월 11일 02시 56분


사상 초유 금융위기 사태로 사상 최악의 ‘레임덕’ 수모

오늘부터 퇴임 ‘D-100’ 카운트다운… 정권인계위 구성

미국 버지니아 주 챈틸리는 워싱턴 백악관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메트로타운이다.

중소규모 자영업체들과 중산층 주택들이 모여 있는 이 지역의 한 사무용가구 생산업체 창고에서 7일 오후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동네 자영업자들 간에 간담회가 열렸다.

대통령을 직접 보는 게 신기한 듯 참석자들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연방 눌러댔고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기립박수를 쳐 줬다.

하지만 이날 부시 대통령의 표정은 유달리 의기소침해 보였다. 지역 TV방송 화면에 잡힌 그의 얼굴 뒤 배경이 대통령 문장(紋章)이나 백악관 로즈가든이 아니라 물건이 대충 쌓여 있는 장소여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발언 내용도 예전의 그답지 않았다.

“7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안이 효과가 있겠느냐”는 한 주민의 질문에 그는 “그게 우리가 갖고 있는 최선의 처방이라고만 말씀드리겠다”고 대답했다.

가구회사 대표가 “대통령은 끔찍한 금융위기를 통제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하자, 부시 대통령은 “데이브(가구회사 대표)가 아까 ‘이제 곧 은퇴할 텐데 혹시 텍사스 ‘토굴’에 가구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걱정해 줬다”고 농담으로 화답했지만 분위기는 달아오르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확 달려들어 (위기를) 멈출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일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며 금융위기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의 일단을 드러냈다.

부시 대통령은 11일로 퇴임 카운트다운 ‘D-100일’에 들어갔다. 차기 대통령에게 정권을 인계하기 위한 정권인계조정위원회도 9일 구성됐다.

물론 부시 대통령이 ‘레임덕’ 표현을 듣기 시작한 건 이미 올해 초부터다. 하지만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 사태를 맞아 그의 ‘말발’은 거의 일몰 직전의 석양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게 워싱턴의 평가다.

부시 대통령은 이달에만 최소 6차례 이상 TV 카메라에 등장해 성명이나 특별연설을 통해 시장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장은 아랑곳없이 곤두박질쳤고 여당인 공화당 하원의원들은 구제금융안을 통과시켜 달라는 호소를 들은 직후에도 대거 반대표를 던졌다.

물론 부시 대통령은 결국 구제금융안 통과를 성사시켰고 이번 주말엔 백악관에서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들과 만날 예정이다. 해외 정상들과 계속 통화하고 있으며 9일 오전에는 백악관에서 특별성명을 발표하는 등 나름대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ABC방송은 “최근 부시 대통령의 어조는 9·11테러 이래 가장 심각하고 진지했으며 단지 연설문을 읽는 게 아니라 정말로 호소하는 태도를 보였다”며 “하지만 의회와 시장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고 논평했다.

래리 사바토 버지니아대 정치학연구소장은 이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레임덕 중 가장 심한 레임덕”이라고 평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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