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쓰나미’ 진앙 월가에 가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9월 20일 02시 59분



“실직 칼바람… 반토막 연봉에도 이력서 수북”

“직장 알아보지만…” 올해만 4만9000명 떠나

붐비던 가재요리집-맨해튼 주택가도 찬바람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른 직장이나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18일 오후 미국 뉴욕 맨해튼 남단에 있는 월가.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한 금융위기 ‘쓰나미(지진해일)’의 진앙인 이곳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월가 입구에 우뚝 서서 강세장을 상징하는 황소 동상 앞에서는 즐거운 표정의 관광객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대형 금융회사가 몰려 있는 월가는 인적조차 드물었다.

월가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리먼브러더스 본사. 15일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한 리먼브러더스 본사는 출입구마다 짙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경비원 두 명씩이 배치돼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일이 신분증을 확인하며 직원들만 건물로 들여보냈다. 기자가 신분증을 확인하는 모습의 사진을 찍으려 하자 이들 중 한 명이 바로 다가와 제지했다.

사실 드나드는 직원들도 거의 없었다. 빌딩 맞은편 거리에서 핫도그와 멕시코 요리 등 간단한 음식을 팔고 있는 한 상인은 “점심식사 시간이 되면 저 회사에서 사람들이 몰려 나왔는데 요즘은 도통 직원들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한 시간쯤 후 건물에서 나오는 한 여직원에게 분위기를 물어보자 “이미 동료들 중 상당수가 짐을 정리해 떠났다. 서로들 앞날을 걱정하느라 제대로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행정 업무를 한다는 이 직원(이름만 엘리자베스라고 밝혔다)은 “남아 있는 직원들도 자포자기 심정으로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지만 지금 분위기에서는 월가에서 직장을 구하기가 쉽겠느냐”고 말했다.

영국계 바클레이스은행이 리먼브러더스의 일부 자산을 인수하기로 했지만 바클레이스가 재고용할 직원은 2만6000여 명 가운데 최대 1만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나머지 1만6000여 명은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할 것으로 보인다.

신참 직원도 이 같은 해고 광풍을 비켜가지 못했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올해 6월부터 리먼브러더스에서 일하기 시작한 중국계 미국인 A 씨는 전화 연결이 되자 “투자은행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 왔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A 씨는 “회사가 쓰러지고 보니 오히려 연봉은 적더라도 투자은행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부럽다”고 말했다.

리먼브러더스 본사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모건스탠리 본사 앞. 합병 추진 소식이 전해지면서 CNBC, 폭스뉴스, CBS 등 방송국 중계차량과 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모건스탠리 본사 건물 외벽에는 이날 상승세를 보인 주식 시황을 알리는 ‘화려한 전광판’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합병 후 구조조정을 예감하고 있는 직원들의 표정은 무거워 보였다. 다가가서 말을 걸었지만 대부분의 직원은 귀찮다는 듯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사실 지난해 8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금융위기가 본격화한 이후 월가에는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멈추지 않았다. 올해 들어서만 이곳에서 4만9000여 명이 실직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바클레이스은행에서 근무했던 김동은 삼성증권 뉴욕법인장은 “월가 투자은행이나 헤지펀드에 다니는 친구들이 요즘은 연락도 닿지 않는다”며 “채권 트레이딩 데스크에 7, 8명의 딜러를 두고 있던 증권사나 투자은행들이 요즘은 1, 2명만 고용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맨해튼에서 기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코네티컷 주 그리니치나 스탬퍼드 일대에는 1인 투자자문사무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헤지펀드가 많이 몰려 있는데 하루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된 월가 출신들이 자신의 집 근처에서 조그맣게 사무실을 내고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헤드헌팅 업체를 운영하는 숀 킴 씨는 “투자은행에서 20만 달러 이상의 고연봉을 받던 직원들이 직장을 잃고 7만∼8만 달러의 연봉도 상관없다며 제출한 이력서가 쌓여 있다”고 말했다.

월가 의존도가 높은 뉴욕 경기도 예년 같지 않다. 특히 월가 고객들이 많은 맨해튼 고급아파트, 고급식당 등에는 찬바람이 돌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1인당 1000달러(약 115만 원)씩 하던 가재요리를 팔던 식당과 1만 달러(약 1150만 원)짜리 마티니를 파는 고급 바가 북적였지만 이제 과거 이야기가 됐다”고 보도했다.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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