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제8장 조선 전쟁과 베트남 전쟁(上)

  • 입력 2008년 3월 3일 15시 45분


철원에 남아 있는 노동당 청사. 천정은 헐고 벽에는 무수한 탄흔이 있다. 김송일 씨가 당시 마을의 그림을 보여 주었다.=한국 강원도에서 나카노(中野)가 촬영
철원에 남아 있는 노동당 청사. 천정은 헐고 벽에는 무수한 탄흔이 있다. 김송일 씨가 당시 마을의 그림을 보여 주었다.=한국 강원도에서 나카노(中野)가 촬영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패배로 인해, 동아시아 지역은 동서 양 진영이 팽팽하게 맞서 대립하는 무대로 바뀌었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에 중국까지 얽혀 냉전 하에서 두 번의 전쟁이 일어났다. 제8장에서는 (상)에서 조선 전쟁(한국 전쟁)을 다루고, (하)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다루기로 한다. 이 두 전쟁이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 왔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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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선이, 한 마을과 주민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하나는 일본이 패전한 후인 1945년 9월, 미국과 소련이 점령 지역을 나누기 위해 그은 38 도선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국 전쟁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1953년 7월 에 그어진 군사 분계선이다. 처음에는 북측 땅으로, 그 다음에는 남측의 일부가 된 마을이 있다. 분단으로 인해 운명이 뒤바뀐 마을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나는 한국으로 향했다.

그 마을은 철원(鉄原)이다. 조선반도(한반도)의 ‘배꼽’이라 불릴 만큼, 정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광대하고 비옥진 평야의 중심에 있어 옛 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1914년, 현재의 서울과 원산을 묶는 경원선이 철원을 통과했다. 경승지인 금강산까지 가는 다른 철로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당시 철원역 앞에는 은행과 상점들이 처마를 나란히 하고 마을에는 병원과 극장도 있었으며, 상수도도 정비되어 있었다. 약 2만 여명 이 사는 내륙의 중심으로 번창했다.

활기가 넘쳤었을 그 곳을, 향토사를 조사하는 김영규(金榮圭) 씨(45)와 함께 찾았다. 38 도선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눈이 남아있는 농지와 키 작은 나무들, 마른 풀들이 널린 들판에 백학과 두루미가 유유자적하게 노닐고 있었다. 한가로운 풍경이었지만, 곳곳에 보이는 한국군의 검문소와 ‘지뢰’라고 쓴 붉은 간판이 걸린 철조망이 군사 분계선이 가까운 것을 알려 주었다. 멀리 수키로 앞에 보이는 산들은 북조선(북한)이었다.

한 때 번성했던 역전 거리에는 벽이 검게 타고 무수하게 총구멍이 뚫린 폐허가 둥그러니 남아 있었다. 김 씨는 “한국 전쟁 때, 격렬한 시가전과 폭격으로 마을은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민간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기 때문에,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고 설명했다.

일본 통치 하에서 태어나 조선 전쟁 때까지 역 앞 번화가에서 산 김송일(金松一) 씨(77)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일생은 두개의 선에 휘말린 사람들의 비극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일본군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도 한 순간, 마을에는 또 소련군이 나타났다.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이 마을은 주민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대국들이 그은 경계선의 북쪽에 들어가 버려 양 진영이 눈을 부라리며 맞서는 최전선의 마을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주민들이 동원되어 북조선의 노동당 청사가 세워졌고 마을 곳곳에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렸다. 38 도선은 북조선의 인민군이 경비를 하게 되면서 남쪽과는 자유로운 왕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어를 강제로 배우게 하더니, 이번에는 공산 사상을 배워야 했지요. 우리는 단지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 6월, 38 도선으로 향하는 병사와 전차 부대의 행렬이 날마다 늘어나는가 했더니, 머지않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다니고 있던 고등 중학교의 상급생들과 동급생들이 징병으로 끌려갔다. 김 씨는 몸을 숨겼지만, 아버지가 감금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자수했다. 인민군이 되어 전차 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서울의 한강을 넘어갔지만, 미군의 반격으로 후퇴를 했다. 약 100일 만에 철원으로 돌아왔을 때, 산을 넘어 도망을 쳤다. 다음 해, 피난을 하다가 미 공군 기지에서 바텐더의 일자리를 찾았다.

어느 날 손님 중의 한 장교가 자신의 전과를 자랑했다. 폭격한 장소를 듣고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라이앵글’.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 된 철원 평야를 당시에 ‘철의 삼각지’라 부르고 있었다. “내 직장의 부대가 내 고향을 폭격하다니. 인생은 참으로 무상하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고 1948년, 반도에는 남과 북으로 갈린 두 개의 정권이 생겨났다. 대한민국(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조선)의 김일성 주석도, 상대를 침공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8 도선을 사이에 두고 양 군대가 서로를 겨누고 있었고 때로는 무력 충돌도 일어났다. “어차피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고 철원에서 만난 전쟁 체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북측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연행 / 농민 등 153명을 총살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은, 미국의 맥아더가 인솔하는 국제 연합군과 중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대규모 국제전이 되었다. 전선은 몇 차례나 남과 북을 오갔고, 그때마다 민중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맨 몸으로 피난을 가거나, 혹은 살기 위해서 당시의 점령자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교외에 있는 고양시의 간선도로가의 작은 언덕을 오르면, 우물처럼 어둡고 깊은 구덩이가 입을 열고 있다. 1995년, 이곳에서 153 명의 유골이 나왔다.

조선 전쟁이 시작된 수일 후, 이 일대는 북한에 함락되었지만, 3개월 안에 다시 한국이 탈환을 했다. “부역자”라는 이유로, 수많은 농민들이 우익 단체와 경찰 손에 연행되어 이 구덩이 앞에서 차례차례로 총살을 당했다. 희생자 중에는 소년 소녀들도 있었다. 유족들의 호소로 조사를 실시한 국가 독립 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 화해 위원회)는 작년에 “경찰에 의한 불법 집단 총살 사건이었다”라는 보고서를 내고 정부가 공식 사죄할 것을 권고했다.

냉전 하의 전쟁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숱한 참극을 불러왔다. 미군에 의한 학살 사건도 있었다. 시민 단체에서는 한국 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희생자 수는 100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하지만, 1990년대 전반까지 계속 된 군인 출신 대통령 시대에는 유족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진실・화해 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서 집단 학살 규명에 힘쓴 김동춘(金東椿) 성공회대 교수는, 민중에게는 학살 그 자체가 전쟁이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학살에 가담한 경찰이나 우익 단체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의 협력자가 많았습니다. 미소가 38 도선을 그었던 것도 일본군의 무장해제 때문이었습니다. 분단과 전쟁의 비극은 식민지 지배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내 토지를 지키겠다”/중국 지원병도 전쟁터로 향했다

한국 전쟁에서는 남과 북을 지원한 20수만 명의 외국인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인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18만 명에 달한다. 왜 이렇게 많은 군사들이 한반도로 갔는가.

베이징(北京)에서 평양 행 야간열차를 타면 14시간이 걸린다. 북한 국경에 가까운 랴오닝(遼寧)성의 단둥(丹東)역에서 택시로 5분 거리인 압록강까지 오면, 강 건너편에 북한이 보인다. 강 한가운데가 국경선이다. 강을 잇는 “중북 우의교”위를 트럭이 줄지어 달린다. 북중 무역의 약 7%가 단둥(丹東)을 경유한다고 한다. 원래, 이 다리는 중국 동북부에 ‘만주국’이 있던 일본에 의해1943년에 만들어졌다. 강 위에는 또 하나의 부러진 다리가 있었다. 한국 전쟁 때 폭격을 받아, 북측 부근의 다리가 무너져 버렸다. 이를 ‘압록강 단교’라고 부른다. 이 다리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다음 해에 만들어졌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잇는 철도와 대륙의 철도를 연결하기 위해서 일본이 만든 것이다. 일찍이 안둥(安東)으로 불린 변방의 마을, 단둥(丹東)은 일본군의 대륙 침략의 거점이었던 것이다.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을 찾았다. 한국 전쟁을 전하는 시설이었다. 관내에는 녹슨 총과 수류탄, 진군나팔, 격추당한 미군기의 파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김일성이 “조선을 미제국의 식민지로 만들 수는 없다”고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지원을 요청한 편지와, 지도자(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 등,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영웅’들의 흉상도 있었다.

쟈오예춘(趙業君) 관장은 “단둥(丹東)은 전쟁터인 조선에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마을 자체도 여러 번 폭격을 받아 희생자가 나왔다. 전쟁은 중국을 지키기 위한, 단둥(丹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라고 말했다. 한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38 도선을 넘어 북진한 것은 1950년 10월이었다. 중국의 ‘인민 지원군’은 압록강을 건넜고, 단둥(丹東)은 출격과 군수 보급의 거점이 되었다. 박물관이 자리한 언덕에는 사령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참전한 노병사를 만났다. 84세의 순찐쿤(孫景坤) 씨는 단둥(丹東) 태생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관동군이 떠난 후, 중국 공산당의 토지 개혁으로 소작농이었던 순 씨도 토지를 가지게 되었다.

압록강을 건너 전쟁터로 향하던 때의 마음을 묻자, 순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내를 오랫동안 볼 수 없다는 것은 괴로웠지만, 언제 미군이 공격해 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모처럼 가지게 된 토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싸우려 했다.”

전쟁터에서는 미군과 백병전을 거듭해 21명을 죽였다고 한다. 같은 부대원 120명 중 살아남은 것은 고작 5명이었다. 손 씨는 허리에 폭탄의 파편이 박히고 어깨에도 총탄을 맞았지만, 아내와 재회할 수 있었다.

1년 전에 새로운 중국이 성립한 직후의 참전이었다. 신중국의 지배 지역도 전 국토에 달하지 못했고,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는 것도 과제였다. 무엇이 참전을 결정하게 하였는가. 냉전기의 중국 외교정책을 연구하고 있는 뉴쥔(牛軍) 베이징대(北京大)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은 1950년 가을에 대만으로 출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 전쟁으로 미군 제7 함대가 대만 해협을 봉쇄하자 긴장감이 감돌았다. 또한, 소련으로부터 김일성이 전쟁에 지게 되면 중국 동북부에 망명 정권을 받아들여 주라는 은근한 요청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직접적으로 마주보게 된다.”

대륙에서의 ‘중미 전면 전쟁’의 위험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미국도 같았다. 원폭 투하와 대만 국민당군의 파병을 주장한 맥아더를, 투르만 대통령은 해임했다. 그 3개월 후인 1951년 7월, 휴전 교섭이 시작되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중국은 북한으로, 미국은 한국으로 영향력을 늘려갔다. 한반도의 운명이, 대국의 생각들을 빼 놓고는 움직일 수 없는 구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다시 철원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폐허가 된 구 시가지를 대신해, 휴전 후에는 수십km 남쪽에 철원군의 새로운 중심가가 생겼다. 정착한 사람들 중에는 북측에 고향이 있는 ‘실향민’이나 가족과 생이별한 이산가족이 적지 않다. 경원선이 개통해 90주년이 되는 2004년, 이들 주민들이 옛 철원 역에 모여, 한국 전쟁으로 분단된 철로를 복원할 것과 평화 통일을 기원했다.

최근 주민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옆 군의 신탄리 역까지만 다니고 중단되어 있던 철로를 철원군 내에까지 일부 복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사는 3월에 시작된다. 군청을 방문하자, 정호조(鄭鎬祚) 군수가 꿈을 말해 주었다. “철원은 남북이 접하는 마을입니다.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여기가 새로운 행정 수도가 될 가능성도 있지요.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나카노 아키라(中野晃)

▼전후 일본의 방향을 바꾸었다.▼

조선 전쟁은 일본에 무엇을 가져왔는가.

조선전쟁 ‘특수’는 일본의 전후 부흥에 기폭제가 되었다. 경찰 예비대(자위대)가 창설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일미 안전 보장 조약이 맺어졌다. 전쟁 중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일본을 공산권의 ‘방파제’로 평가하는 미국의 전략을 반영한 것이었다.

방파제의 중요한 거점이 된 것은 오키나와였다. 가데나(嘉手納) 기지에는 조선 전쟁으로 원폭이 설치되고 테스트를 위해, 모의 원폭을 비롯한 거대한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가 북조선(북한)을 향해서 몇 번이나 날아갔다고 하는 미국인 연구자의 지적도 있다.

당시, 기지에 가까운 온나(恩納) 마을에 살고 있던 오시로 야스히데(大城保英) 씨(67)는 매일 저녁, 동중국해를 넘어 북쪽에서 돌아오는 프로펠러 폭격기를 보았다. 휴전 교섭이 진행되던 1953년 4월, 미군은 토지 수용령을 내리고, 저항하는 민중을 내쫓고는 불도저로 집과 논밭을 부수어, 새로운 기지를 늘려 갔다.

히야네 데루오(比屋根照夫) 류큐대(琉球大) 명예 교수는 “조선 전쟁을 통해 미국은 오키나와를 군사 거점의 요지로 중요성을 새삼 인식했다”고 지적한다. 훗날 베트남 전쟁 때, 오키나와는 최대 규모의 폭격 거점이 되었다.

조선 전쟁(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해, 1953년 7월 23일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지금도 ‘휴전’상태이다.

한국에서는 개전 날짜인‘6•25 전쟁’이라고도 하고 ‘한국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에서는‘조국 해방 전쟁’이라 부른다. 참전한 중국은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을 지원했다는 뜻으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 부른다.

1948년에 출범한 한국과 북한은 모두 한반도의 전 국토를 영토로 하며, 서로를 ‘비합법’이라 주장하고 있다. 당초, 한국 전쟁은 정권의 정통성을 둘러싼 내전의 성격이 강했지만, 미군이 이끄는 국제 연합군과 중국군의 참전에 의해 국제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소련도 공군 조종사를 북측에 가담시켰다. 일본도 미국 측의 요청으로 비밀리에 소해정을 보내, 1명이 사망했다.

전쟁의 경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침공했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미국은 ‘침략 행위’라고 비난을 했다. 1950년 7월, 소련이 결석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국제 연합군’의 파견 결의가 채택되어, 미군을 주체로 영국과 프랑스 등 합계 16개국에서 전투 부대를 파견했다.

북한 측은 부산에 가까운 낙동강까지 공격을 해왔지만, 맥아더가 인솔하는 국제 연합군의 인천 상륙을 계기로 한국 측이 9월에 서울을 탈환했다. 10월에는 38 도선을 넘어 평양까지도 점령했으며, 일부는 중국과 북한의 국경 주변까지 이르렀다. 같은 달, 중국이 인민 지원군을 파병하면서 형세는 역전되었다. 북한 측은 1951년 1월에 서울을 재점령했지만, 2개월 후에는 다시 한국군이 되찾았다. 그 후, 전선은 38 도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반복했다.

같은 해 7월에 정전 교섭이 시작되었지만, 경계선의 위치와 포로의 취급을 놓고 난항을 겪었다. 교섭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되었다.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의 죽음을 계기로 교섭은 본격화 되었다. 7월에는 국제 연합군과 북한군, 중국군의 3자가 휴전 협정에 서명했지만, 한국은 하지 않았다.

휴전 협정으로, 한국과 북한을 나누는 새로운 군사 분계선이 그어지고, 경계선으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km가 비무장지대(DMZ)가 되었다.

김일성(金日成)(1912-94)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 건국 당시의 최고자이다. 1972년에 신설된 국가 주석에 올라, 1994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있었다. 중국 동북부 등지에서 항일 유격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이 패전한 후, 소련군과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다. 한국 전쟁에서는 인민군 최고 사령관이었다. 그 후 중소 대립을 배경으로, 독자적인 주체 사상을 내걸고 독재체제를 굳혔다. 1994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직전에 급서했다.

이승만(李承晩)(1875-1965)

대한민국(한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독립 운동으로 투옥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상하이(上海) 임시 정부의 수반도 맡았지만, 해방까지 미국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에 귀국하여 우파의 지지를 모았다. 1948년, 남한에서의 단독 선거를 거쳐 수립된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 전쟁 후에는 독재를 드러내 1960년 선거에서 4선을 했지만, 정권 부패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데모 ‘4•19 혁명’에 의해 사임을 하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조선 전쟁과 베트남 전쟁…교과서 비교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들춰내는 근대…박유하 세종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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