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한들 ‘추장’ 알아보곤 “해치지 않겠다”

  • 입력 2007년 1월 15일 02시 54분


2003년 8월 나이지리아 하코트 항의 에자마 커뮤니티에서 명예추장으로 추대된 김우성 대우건설 차장(가운데)이 대추장인 아이작 아그바라 씨(왼쪽)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3년 8월 나이지리아 하코트 항의 에자마 커뮤니티에서 명예추장으로 추대된 김우성 대우건설 차장(가운데)이 대추장인 아이작 아그바라 씨(왼쪽)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긴장의 61시간이었다. 10일 새벽(현지 시간) 무장단체에 납치된 대우건설 나이지리아 현장의 직원 9명은 맹그로브가 우거진 수용소를 옮겨가며 이틀 반을 끌려 다녔다.

지난해 11월 다른 무장단체에 끌려간 이탈리아인들이 아직 억류돼 있다는 소식은 긴장을 더했다. 하지만 27년 전 현지에 진출해 민간외교 채널을 구축해 온 회사를 믿고 또 믿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12일 오후 5시 40분. 드디어 귀환용 헬기가 수용소에 내려앉았다. 악몽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직원 중에는 2003년 대우건설 본부가 있는 하코트 항(港) 인근 부족의 ‘명예 추장’으로 추대된 김우성(49) 차장이 포함돼 있었다. 지금까지 나이지리아에 22년간 체류한 그는 현지인들에게 결혼 지참금을 대줄 정도로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이 칭호를 받았다.

김 차장은 14일 새벽 본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피랍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전했다.

○새벽을 깨운 총성

‘탕, 타당, 쾅.’

10일 오전 4시 50분 나이지리아 남부 바옐사 주의 오구 공사현장 숙소. 진동하는 총소리와 폭발음이 김 차장을 깨웠다.

흑인 50여 명이 스피드보트 5대에 나눠 타고 캠프로 다가왔다. 보트 2대는 외곽을 지켰고 나머지 3대에 있던 괴한들만 상륙해 숙소를 덮쳤다.

“무브(Move), 무브!” 괴한들은 직원들에게 배에 타라고 소리치며 위협사격을 했다. 캠프에는 현지인 경비원 20여 명이 있었지만 대부분 달아났다.

김 차장 등을 실은 보트는 3시간 반가량 달렸다. 괴한들은 보트 바닥에 바짝 엎드리라고 명령했고 이따금 사방에 총을 난사했다. 그는 “다른 조직의 영역을 통과할 때 신호를 보냈던 것 같다”며 “고막을 찢는 듯한 총소리로 공포에 떨었다”고 말했다.

○‘추장’을 알아보다

김 차장 일행이 도착한 곳은 숲 속의 임시 거처. 괴한들은 일행을 한곳에 몰아넣었다.

정신을 차리고 창문으로 주변을 살피던 일행은 괴한들 사이에서 몇몇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과거 대우건설 현장에서 일했던 현지인 인부들이었다.

동료들이 “여기 ‘치프(Chief·추장)’가 있다”고 소리쳤다. 전직 인부들이 김 차장을 알아본 뒤 분위기는 조금씩 누그러졌다. 이들은 그에게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당신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다. 석유와 천연가스를 장악한 외국 기업들을 폭로해 달라.”

한편 납치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은 비상이 걸렸다. 정부의 노력과 별도로 대우건설은 모든 채널을 동원해 직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대우건설 나이지리아 사무소에는 한국인을 봤다는 첩보가 도착했고 잠시 후 무장단체가 협상을 제안해 왔다.

○“아, 살았구나!”

억류 이틀째인 11일. 대우건설은 현지 주정부 관료가 이끄는 협상팀을 파견했다. 무장단체의 정체는 지난해 대우건설 직원 등을 납치했던 니제르델타해방운동(MEND)에서 작년 말 독립한 신생 조직.

협상팀은 즉시 MEND의 최고 지도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작년 납치 사건 이후 대우건설은 MEND와 비공식 채널을 갖고 있었다.

MEND 지도자는 무장단체에 “2시간 안에 석방하든지, 우리한테 인질을 넘기라”고 압력을 가했고, 김 차장 일행은 이날 밤 배로 5시간 반가량 떨어진 MEND의 은거지로 이송됐다.

억류 3일째인 12일. 아침 식사로 아이스박스에 담긴 김밥과 김치찌개가 나왔다. 협상이 잘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피랍 근로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오후 5시 40분 대우건설 측은 MEND와 협상을 타결했다. 외교부와 대우건설은 “최초 납치조직은 요구사항이 있었지만 MEND는 조건 없는 석방에 합의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협상이 6시간이나 걸렸다는 점에서 석연치 않은 대목도 있다.

김 차장은 귀국하면 몇 주 쉰 뒤 다시 나이지리아로 돌아갈 예정이다. “겪을 것 다 겪어서 이젠 무서울 것도 없습니다. 하던 일을 마저 해야죠.”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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